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坡平尹氏 昭靖公派蔚山 蘇亭門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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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世)영은공 諱흥상(永隱公 興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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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주 댓글 10 조회 30,900 작성일 06-11-28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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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 534게시글로 정리된 내용을
2006년11월26일 영은공 諱흥상(永隱公 興商) 추향제참관 후 울산소정문중 가척문중 사청문중 등12자제분 중 기록상 두분은 갑자사화로 화를 당하였다고 하나 3개 문중이 주관이 되어 봉행한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금할수 없었습니다.
앞으로 후손된 도리로 정립을 해야할 과제라 생각하며 자료실에 올려 둠니다.
저희 울산소정문중청년회에서 소 문중 활동중 영은공 諱(휘)흥상 할아버지의 행적 및 자료를 추적하게 된 동기는
기이하게도 한분의 조상님을 두고 두곳에서 추향제를 지내며 묘소 또한 두곳에 존제하고 있는 실정이라 후손 된 도리로 진실을 찿아
고증을 받은 곳에서 성묘와 제례를 올려야 마땅하다는 생각에서 객관적인 자료를 추적 조사한 내용을 정리하고 져 함니다
먼저 저희 본 문중 선조들의 인물사에 정리된 18世(세)영은공할아버지의 자료는 중복을 피하여 생략 함니다
영은공 諱흥상(永隱公 興商)
공의 字는 성좌(聖佐)이시며 號는 영은(永隱)이신데 1420(세종12년 庚戌)생이시다.
공은 배천공 坰의 아드님으로 벼슬이 通政大夫 敦寧府都正이셨고 세째 아드님이 귀하게 되시어 正憲大夫 吏曹判書로 追贈되셨다.
그 아버님 배천공께서 소시적에 술에 취해 꽃나무 아래에서 잠이 드셨다가 꿈에 나무 한 주에 꽃이 네잎이 피었는데 꽃이 둘은 피기는 하였으되 시원치 않고 그중 세째 꽃이 가장 아름답게 피었는데 돌연 맹열한 바람이 불어 꺾이었고 그 꽃이 꺾일 때 넷째 꽃이 상하였다.
이러한 이상한 꿈을 꾸신 후에 그후부터 아들 4형제를 두시어 장남은 輔商이요, 둘째는 佑商이고 셋째가 弼商이니 領相公이요 네째가 興商이니 즉 공이었다.
세째 필상은 영의정에 이르셨지만 연산조 때 화를 당하여 비명에 돌아가셨고, 네째인 공의 운명은 과연 어떠할지,
일찍이 영상공께서는 공에게 “자네는 먼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가게, 나도 또한 뒤에 따라 갈터이니” 하셨다.
공은 벼슬을 버리고 남으로 안성을 향해 가셨다.
공이 표연히 말을 몰아 고향으로 떠나가실 때 영상공께서도 전별을 하시면서 한강을 건너 보내실 때 집안에 간직하였던 열가지 보배를 주셨는데 그중에 물소뿔로 만든 부채는 근래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모두 공의 고매한 식견을 높이 평가 평가하였는데 陽谷 蘇世讓 같은 분은 말하기를“세상 사람들이 모두 미혹하였지만 공만은 홀로 이 일을 내다 보았기 때문에 그곳으로 내려가신 것이다” 라고 하여 일대의 화제가 되었다.
공이 말고삐를 잡고 채찍질을 하시면서 고향길을 가시는 동안 도중에 읊은 시가 수백수나 되는데 모두 기묘하여 그후에 이 시를 읊은 사람이 많았다.
공이 고향으로 내려가서 비봉산(飛鳳山) 밑에 서당을 지어놓고 이름하여 永隱堂이라 했고, 또한 분토산(粉土山) 밑에 한집을 지어 백직제 (白直齋)라 이름하여 배우는 사람과 함께 경사(經史)를 토론하시고 간혹 거문고와 술, 시로써 취미를 삼으시고 한가한 때는 배로써 앞내에서 선유하시니 보는 사람마다 선옹(仙翁)이라 하였다.
공이 忠과 信으로써 鄕黨에서 행하시니 그 고을 사람들이 官에 소송을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공에게 문의한 후 불가하다고 하시면 고소치 않았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이 배우러 오면 의식을 주니 食客이 매일 10여명이나 되었다.
妹夫 申公이 수령으로 있을 때 벼루집 하나가 진귀하여 값나가는 것이므로 공에게 선사하였으나 공이 받지 않으시고 글을 써서 충고하시되 “이것이 무릇 민가 소산이다” 하시니 申公이 사과하였다.
配는 彦陽金氏로서 縣監 尙一의 따님이다. 6남 2녀를 두셨는데 장남은 仁이요, 다음은 傅, 홍(亻+弘)인바 다른 삼형제는 화를 당하여 전하지 못하고 있다. 공은 자녀가 12남 2녀나 되었다.
甲子年에 영상공이 화를 당할 때 공과 그 아드님 부와 홍 두분은 모두 귀양갔었는데 그때 부께서는 掌令 벼슬을 하셨고 홍께서는 郡守이었다.
당시 연산군이 공의 아드님이 많다는 것을 듣고 전가를 몰살하라고 명령하였으므로 자손들이 혹은 변명을 하여 난을 피할 적에 서모인 김씨의 성을 따서 김씨라고 한분도 있는데 庶子 德源은 弓歸池ppp라고 하여 화를 면했고 德陽과 공의 손자님 克煥은 모두 화를 당했다. 克煥은 傅의 아드님이시다.
중종 원년(丙寅年)에 놓이어 돌아오셨지만 傅께서는 昌原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작고하시고 그 외에 도망하여 숨어 계시던 분은 모두 귀환하셨다.
공은 중종 4년(己巳)에 80세의 향수로 세상을 떠나셨다. 묘소는 안성 가토면 구사곡 신원이며 두 부인도 그곳에 모셨다. 영은당과 백직재 舊址가 거기서 멀지않다.
위의 내용은 순조30년(1830년)발간된 경인대보의 기록에서 발췌한 내용 임니다
아레의 비문은 전라도 나주에 있는 또 한곳의 영은공諱興商의 비문 임니다
永隱公 碑文
公諱興商字湯佑領相公弼商之弟考諱坰白川郡事 贈領議政祖諱希齊檢叅議曾祖諱坤佐命功臣坡平君燕山甲子連謫靈岩中道羅州宣德庚戌生正德二年丁卯卒于朴浦禮葬防築內午坐之原配咸豊李氏瑞之女上下葬碑碣兵火蕩失故重修于此.
영은공 할아버님의 자료입니다.
자료 출처는 "파평윤씨천년사" "파평윤씨대관"입니다.
문장 자체가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는데 잘 수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만--- (충청도의 33세손 이라고 하신 분의 자료 임니다)
*위 비문의 한글 내용은(본 문중 부회장님이신 주석34세손님과 고문이신 진수33세손님의 해석과 고증 내용)
영은공비문
공휘흥상자상우(湯佐 상좌)영상공 필상지제고휘경배천군사
증영의정조휘희제검참의 증조 휘 곤 좌명공신 파평군 연산갑자연적영암중도 나주 선덕 경술생 정덕 2년 정묘 (己巳기사)졸우 박포 예장 방축 내 오자지원배함풍이씨서 지여 상하장 비갈 병화탕실고중수우차
( )안은 내가 알고있는( 족보 상)것임
(비문 해석)
공의 이름은 흥상이며 자는 상우 (湯佐 상자) 이며, 영상공 "필상"의 아우이며, 아버님의 이름은 "경" 배천군수이시다. 증 영의정이신 할아버지의 이름은 "희제" 검참의 이시다 증조 할아버지의 이름은 "곤" (소정공) 좌명공신파평이시다.
연산 갑자사화때 영암 나주로 가는중이다. 선덕 경술생이며 정덕 2년 정묘 (己巳 기사)에 돌아 가셨다. 박포라는 사람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렀으며, 방축 오자에 자리 잡았으며,배위는 한풍 "이진"의 딸이며 묘는 위,아래로 섰으나 전쟁으로 소실 되였으나,후에 중후 하였다.
(나의 생각) (본 문중부회장님 주석34세손)
어디에서 비문을 입수 하였는지 알수없으나,( )안과같이 족보 기록상(庚寅譜) 많은 차이가있으며,배위(配位)에 함풍이씨 라고했는데,족보에는 본처에 언양김씨(彦陽金氏)이며, 후처에는 경주김씨(慶州金氏)로되여 있단다.
아마도,전라도 비문인것같다. ......

*비문의 출처를 문의한 결과 아레의 서책에서 발최된 내용으로 밝혀짐
발행처 : 坡平尹氏千年史寶鑑編纂會
편집 : 族譜史料硏究院
발행인 : 尹가鉉
발행일 : 2000. 8.17
연락처 전화 02-3143-4684
*또한 위의 출처를 알려준 대문중의 한 원로분께서는 아레의 내용도 같이 이-메일로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坡平尹氏大觀 259쪽에도 같은 내용이 있어요.
발행처 : 坡平尹氏大觀編纂會
발행인 : 尹秉星
발행일 : 2000. 1. 1
연락처 전화 02-765-4413
위 두 권의 책에 내용은 같은데 밑에 있는 책에는 비문이 없어요.

*저로서도 더 이상의 자료가 없어요. 어제 보내드린 경인보에는 안성이 맞는 것 같은데요. 안성에서 묘를 실전하였다가 正廟 22年(戊午-1798年)에 尋護하였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 묘를 쓰신 곳이 안성이 맞는 것 같아요. 더 이상 찾을 곳이 없어요.

*안녕하셨어요? 저도 조금은 혼란스럽네요. 비문의 출처는 尹氏千年史 하권 400-402쪽에서 찾았는데요. 비문은 9代孫 東一識書로 되어 있어요.
그리고 제가 가지고 있는 庚寅譜 戊卷 庚編 1 地에는
興商 字聖佐號永隱贈吏曺判書燕山甲子退居安城飛鳳山下宣德庚戌生壽八十 配彦陽金氏父縣監尙一 后配慶州金氏父通德允灝外祖進士平澤林芳 墓安城加土面紛土山辛原合葬舊失傳正廟戊午尋護 이렇게 되어 있어요.
등의 익명 또는 세손을 밝히신 뜻 있는 분들의 의견과
전라도에 있는 비문의 산소에 관한 내용들을 보면 최근에 발행된 내용들 이라는 대 주목하여 본소정문중 또는 대종회에서 문중의 일에 소흘 하다는 소수 젊은이들의 분개 섞인 내용도 다수 있었으나 생략하기로 하며
그 의견들을 요약하자면 소송을 한다 하여도
그 문중의 대동보나 후손들이
조상의 산소를 가장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지
판사 또는 제삼의 기록으로 그 문중의 산소위치를 판단하게 한다는 것 자체가 가문의 수치라는 논리 이었습니다

위의 내용 등을 정리하여 본 문중 원로님들께 자문을 구한 후 개인적으로라도 전라도 나주를 방문할려고 하였으나
저히 울산소정문중 울산사청문중 경주가척문중을 중심으로 갑자사화의 화를 면한10분 자제분 중 3개 소문중이 중심이 되어 영은공 파종회를운영하고 있으므로 저희 울산소정문중 독단적인 접근 사안이 아니다 는 판단하에 추후의 일은 영은공 파종회의 한 구성원으로 참여하기로 하였습니다

2006년6월17일
파평윤씨 울산 소정문회 청년회장 34세손 璇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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