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왕후 윤씨
정희왕후는 판중추부사 윤번의 딸로 본관은 파평이다. 1418 년 홍주군에서 태어나 1428년 가례를 행했으며, 처음에는 낙랑 대부인에 봉해졌다가 수양대군이 조선 제7대 세조로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 되었다. 정희왕후는 계유정난 당시 정보 누설로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 용병을 결행하게 할 만큼 결단력이 강한 여장부 였다.
1468년 예종이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예종이 재위 1년 2개월 만에 죽자 절한 맏아들(의경세자.추증 덕종)의 둘째아들 자을산군(성종)을 그날로 즉위시켜 섭정을 하기도 했다.
예종이 죽었을때 정희왕후의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으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를 넘겨주지 않았으며, 덕종에게도 큰아들 월산대군이 있었으나 자을산군을 즉위시킨 것은 순전히 정희왕후 개인의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13세의 어린 자을산군을 대신하여 무려 7년 동안 정사를 이끈 정희왕후는 섭정 기간중에 과감하고 결단력있는 성품을 마음껏 발휘하여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성종이 성년이 되자 섭정을 끝내고 1476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처럼 과단성있는 행동으로 조정을 안정시킨 정희 왕후는 1483년 3월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정희왕후의 소생으로는 덕종(의경세자), 예종 등 2왕과 의숙공주가 있고, 능은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광릉으로 세조의 능 동편 언덕에 있다.
폐비 윤씨
판봉상시사 윤기무의 딸이며 연산군의 어머니이다.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에 봉해졌고, 성종의 총애를 받다가 1474년 공혜왕후 한씨가 죽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왕비로 책봉되던 해에 세자 융(연산군)을 낳았는데, 투기가 심해 성종을 난처하게 하는 일이 잦았다. 1477년 극약인 비상을 숨겨두었다가 발각되어 왕과 왕 주위의 후궁들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빈으로 강등될뻔했으나 성종의 선처로 무마되었다.
1479년 왕이 규방 출입이 잦고 자신을 멀리한다 하여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게된다. 이 일로 성종과 모후 인수대비의 격분을 유발하여 폐비가 된다.
세자의 친모라는 이유로 대신들이 폐비를 반대했으나 인수대비와 성종의 입장은 단호했다. 윤씨는 친정으로 쫓겨난 뒤 바깥세상과 접촉이 금지되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러자 폐비는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근신하며 지냈다.
1482년 조정에서는 장차 왕이 될 세자의 친모를 일반 백성처럼 살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상소가 이어졌고, 한편에서는 이를 반대하는 무리들이 윤씨를 비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폐비를 옹호하던 자들은 조정에서 따로 거처할 곳을 마련하여 주고 생활비 일체를 관부에서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를 반대하는 측의 태도도 완강했다.
특히 성종의 모후 소혜왕후(인수대비 한씨)와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성종도 쉽게 폐비에 대한 거처를 마련해 줄수 없었다.
성종은 세자가 성장함에 따라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심을 갖고 내시와 궁녀들을 시켜 폐비의 동정을 살펴오라 하였는데, 이들 내시와 나인은 인수대비의 명에 따라 왕에게 폐비가 전혀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는다고 허위 보고를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 대신들에게 폐비 윤씨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게 하여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폐비 윤씨를 사사하였다. 사사한 이후 폐비 윤씨의 묘에는 묘비도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성종은 세자의 앞날을 고려해 “윤씨지묘”라는 묘비명을 내렸다. 그리고 장단도호부사로 하여금 절기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성종은 자신이 죽은 뒤 100년까지는 폐비 문제에 관해 논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겼다. 연산군은 즉위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윤씨의 폐비 사건을 알게 되었고, 신원을 모색했다. 1497년 폐비의 묘를 개장하고, 1504년에는 성종의 유명을 어기고 제헌왕후에 추승했으며 묘도 회릉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윤씨의 관작도 추탈된 뒤 신원 되지 못했다.
정현왕후 윤씨
성종의 세번째 부인이며 중종의 친모이다. 우의정 윤호의 딸로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숙의에 봉해졌으며, 1479년 윤씨가 폐출되자 이듬해 11월 왕비에 책봉되었다. 1497년 자순대비에 봉해졌으며, 1530년 68세를 일기로 죽었다.
소생으로는 중종과 신숙공주가 있고, 능호는 선릉으로 성종의 묘와 함께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장경왕후 윤씨
장경왕후 윤씨는 영돈녕부사 윤여필의 딸로 1491년 호방현 사제에서 태어나 고모인 월산대군의 부인에 의하여 양육 되었다. 1506년 중종의 후궁이 되어 숙의에 봉해지고 1507년 중종비 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1515년 세자(인종)을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엿새 만에 25세를 일기로 경복궁 별전에서 죽었다. 소생으로는 인종과 효혜공주가 있다. 능호는 희릉으로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문정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는 영돈녕부사 윤지임의 딸로 1501년에 태어났다.
1517년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545년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에게 정권을 쥐게 하고 인종의 외척인 윤임을 죽이고 윤원로를 귀양보내기도 했다. 문정왕후는 성질이 독하고 질투가 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인종의 집권시에는 툭하면 인종을 찾아가 “우리 모자(문정왕후 와 명종)을 언제쯤 죽일 거냐” 하면서 괴롭혔다고 한다. 일설에는 문정왕후가 건네준 독이든 떡을 먹고 인종이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명종을 대신해 섭정을 펼칠 때에는 왕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었으며, 수렴청정에서 손을 뗀 뒤에도 명종의 정사 운영에 지나친 간섭을 해 조정을 뒤흔들어놓기도 했고, 왕이 자신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매질을 하거나 독설을 쏟아놓기도 했다. 문정왕후의 지나친 집권욕은 결국 명종 대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문정왕후는 불교의 부흥을 꾀하기도 했는데 1550년 선,교 양종을 부활시키고 폐지되었던 승과, 도첩제 등을 다시 실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승려 보우를 총애하여 병조판서직에 제수하는 바람에 대신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명종은 문정왕후의 지나친 정권욕에 불만을 품고 한때 을사사화 때 죽은 선비들을 신원하고 신진 사림 세력들을 등용시켜 외척 세력을 견제하려 했으나 번번히 문정왕후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조선 조정을 패권 다툼의 장으로 몰아갔던 희대의 악후 문정왕후는 1565년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소생으로는 명종, 의혜공주, 호순공주, 경현공주, 인순공주 등 1남 4녀 이다.
능은 태릉으로 현재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