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氏始祖의 탄생 설화와 전설들
尹氏의 姓과 始祖 設話
윤(尹) 씨 시조의 탄생 설화와 전설들
용연(龍淵:일명 가연)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눌로리에 있으며, 태고적부터 지하수가 솟아나는 천연의 연못이다. 옛부터 종중(宗中) 준설한
것으로 보이나 기록(記錄)은 찾을수 없다.
근대(近代)에는 서기 1900년 강화문중(江華門中)에서 준설하고 “파평용연(坡平龍淵)”이라는 비석(碑石)을 세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6.25동란 당시 크게 훼손되어 1972년 3월에 문정공파(文定公派) 종중(宗中)에서 “파평윤씨 시조 발상지
비(坡平尹氏 始祖 發祥址 碑)”를 새로 새겨 건립하였다. 연못 주위는 초장(草場)이었는데, 1976년 3월에 태위공파(太尉公派)
예산종중(禮山宗中)에서 수양버들 150株, 은행나무 6株, 벚나무 5株를 식수 하였다.
옛부터 “윤씨연못”으로 공칭(公稱)되어 왔으나 세부 측량 당시에 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유(國有)로 편입되어 있었다.
그때문에 일정(日政) 당시에 坡州邑에 거주하는 노(魯) 모씨가 개답(開沓)하기로 허가를 받은 것을 발각(發覺)하고, 우리 宗中에서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勝訴)한 결과 지적대장에는 “윤씨 연(尹氏 淵)”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던 것을 1977년 1월 14일 大宗會에서 宗中 所有로 소유지
이전등기를 완료했으며, 면적은 2,531평이다.
윤(尹) 씨 시조의 탄생 설화와 전설
전설에 따르면 용연에는 용인이 살고 있어 연못가가 불결해지면 뇌성이 진동하고 폭풍우가 친다고 전한다.
始祖에 관한 전설이란 신라 진성왕 7년(서기 983년) 음력 8월 15일 용연위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요란한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용연 위에 한개의 옥함이 떠 올랐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이를 기이하게 여기고 고을 태수에게 고하여 태수가 연못가에 나가보니, 용연 연못에
떠오른 옥함이 연못 가운데로 밀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날이 저물 무렵 연못가에 빨래를 하던 한 노파가 옥함이 다시 떠오르는
것을 보고 이를 건져내어 열어보니 그 속에는 오색의 우모(羽毛)에 쌓여 있는 어린 사내 아기가 있었다.
찬연한 서기를 발하면서 옥함에서 나온 사내 아기는 융준용안(隆準龍顔)으로 코가 우뚝하여 용의 상을 닮았으며, 양쪽 어깨에는 붉은 사마귀가
있어 일월(日月)을 상징하고 좌우 겨드랑이에는 비늘이 81개가 돋아 있었으며, 발에는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어서 북두칠성의 형상과 같았고 온
몸에는 광채가 솟아서 눈을 부시게 하였으니 이 아기가 파평 윤씨의 시조가 되는 어른이시었다.
이러한 탄생 설화를 가진 始祖 태사공께서는 파주산 아래에 사시면서 학문과 무예를 닦으셨는데 파평산 마루에 말이 달릴 수 있는 길을 닦고 궁마
훈련을 하시었다. 파평산 마루에서 말을 달리시며 무예를 연마 하시던 곳이 치마대(馳馬臺) 라고 하는데 지금도 태사공께서 길을 닦으셨던 석축의
일부가 남아 있다. 치마대에서 태사공께서 기마술을 연습 하실 때에 애마가 죽었으므로 작은 철마를 만들어 그 곳에 두었는데 후일 어떤 철공이
그것을 훔쳐 갔다가 그만 즉사를 했고, 그때 함께 갔던 사람이 두려운 생각이 나서 흙으로 구운 작은 말을 가져다 놓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
태사공께서 학문을 닦으시던 금강사(金剛寺)도 지금은 형적이 없고 다만 그 사지만이 남아 있다.
태사공께서는 파주에서 임진강을 건너 개경을 내왕 하실적에 공이 강을 건너실 때에는 항상 강물이 갈라지며 홀연히 백사장이 드러나서 신발을
적시지 않고 강을 건너셨고, 송도에 있는 조정에 출사 하신 뒤에도 말을 타시고 파평면에 있는 사저에서 강너머로 내왕 하시는데 말의 빠르기가
나는 듯 하였고, 강을 건널 때에는 물이 양쪽으로 갈라졌다고 하여 이를 두고 이곳을 ‘물결을 끊고 마시듯이 강을 건넌다’하여 여음진(如飮津)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가 음진(飮津)으로 고쳤는데 이것이 다시 후세에 음이 변하여 임진강이 되었다고 전한다.
윤관 장군님 전설
또, 尹氏가 잉어를 먹지 않는 이유는 5세 문숙공(諱:瓘)께서 함흥 선덕진(咸興 宣德鎭) 광포(廣浦)를 건너서 적군을 추격 하시다가 복병에게
포위를 당해서 위급한 지경에 있었는데, 척준경(拓俊京)이라는 부하 장수의 힘을 입어서 간신히 살아 나오시어 이십 여명의 부하들이 보호해서
포위망을 벗어나 돌아 오시다가 광포에 당도 했는데 해는 저물었고, 광포는 물이 들어와서 다리가 보이지 아니했다. 그 광포에 물이 없을 때에는
드문드문 다리를 놓고 건너 다니고, 물이 들어 올 때에는 건너지 못하여 불통되던 곳인데, 그날은 물속으로 다리의 형체가 보이므로 간신히 건너
왔는데, 쫓아 오던 적군이 이 다리를 건너고 있을 때, 물속에 보이던 다리의 형체가 보이지 않아 적군이 물에 빠져 죽었다. 문숙공은 잉어 떼가
다리를 놓아 건너 오셨다고 해서 도린포(都鱗浦)라 했고, 잉어가 공을 도와 드렸다 해서 윤씨들은 잉어를 먹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