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연
- 봉강재
- 여충사
- 상서대
- 치마대
- 낙화암
용연
용연은 우리 시조 태사공 할아버지께서 탄강하신 성지로서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눌노리에 있으며 옛부터 “윤씨 연못”이라 일러오고 있는데 수호전 1,500평이 있어 관리인이 수호하고 있습니다.
1920년에 “파평 윤씨 용연”이라는 비석을 세웠는데 6.25 동란 당시 크게 훼손되었으므로 1972년 “파평 윤씨 시조 발상지 비”를 새로 새겨 세웠습니다. 또한 1992년 용연지신비와 상석을 건립 준공하였습니다. 시조 할아버지의 탄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라 진성왕 7년(서기 893) 음력 8월 보름날 용연위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요란한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큰 연못위에 한 옥함이 떠오르자 마을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어 고을 태수에게 고하여 태수가 연못가에 나가보니 옥함이 떠올랐다가 연못 가운데로 밀려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러던 중 날이 저물 무렵 연못 가에서 빨래하던 한 노파가 옥함이 다시 떠오르는 것을 보고 이를 건져내어 열어보니 그 속에는 오색 찬란한 깃덜에 쌓여있는 어린 사내아기가 들어 있었습니다. 찬란한 서기를 발산하면서 옥함에서 나온 사내 아기는 코가 우뚝하며 용의 형상을 닮았고 양쪽 어깨에는 붉은 사마귀가 있어 일월을 상징하고 좌우 겨드랑이에는 여든 한 개의 비늘이 돋아 있었으며 발에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어서 북두칠성의 형상과 같았고 온 몸에서 광채가 솟아나 눈을 부시게 하였으니 이 어른이 바로 우리 파평윤씨의 시조이십니다.
봉강재
봉강재는 경북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 운주산 구봉하에 있는 시조 태사공 할아버지의 묘소와 별묘를 모신 영역을 통칭하여 말한다.
봉강재의 연혁
시조공의 묘소는 이 지방의 토호 이하지가 석물들을 없애고 투장하여 일시 실전 되었습니다. 후손들은 옛날부터 전해오는 문헌과 그 지방 노인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윤능골 이라는 이야기를 근거로 묘소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24세손 이공이 경주부윤 재임시 백방으로 수소문하며 찾기를 힘썼으나 단서를 잡지 못하고 , 영조 13년에 25세손 봉정공이 경주 영장으로 부임하여 묘소 부근을 파헤쳐 "대 부 윤"이라 크게 새긴 부서진 비석 조각을 발견하여 모든 종인들에게 알리니 시조 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을수 있는 희망이 생겼다며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그 후 2년이 지나 1793년에 이공의 아드님이신 양래공이 경상감사로 부임한 후 7일간에 걸쳐 주위를 파헤쳐 "선지", "금강"이라 새긴 비석 조각을 발견 하였는데 "선지"는 태사공 할아버지의 아드님 휘자며, "금강"은 태사공 할아버지 손자의 휘자 이므로 태사공 할아버지의 묘소가 틀림 없음을 확인하고 지방의 토호인 이하지가 투장하였던 6기의 묘소를 전부 파서 이장 시켰습니다.
그 다음 해에 판서 혜교공, 감사 양래공, 부사 동설공, 승지 휘정공, 현령 사도공, 참판 용공등 여러 후손이 상의하여 널리 종문에 통고하고 태사공의 묘소를 개축하고 묘비등 기타 석물을 두루 갖추고 제사답을 마련하여 매년 음력 10월10일에 제사를 봉행 하기로 결정 하였다 합니다.
그러나 현재는 1982년 1월12일 대종회 결의에 따라 매년 음력 10월1일에 추향제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서기 1752년 27세손 지돈령이신 광소공이 안동 부사로 부임하셔서 영정을 모시고 분향 할 수 있는 분암(봉서암)과 제실을 창건하고 제기 일체와 위토를 많이 확보하여 승려로 하여금 묘역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서기 1833년 재실 뒤에 봉강서원을 창건하여 태사공의 위패를 모시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드렸으나 35년후인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철폐되고 그 자리에 유허비를 세웠으며 재실뒤에 별묘를 새로 짖고 태사공의 위패를 옮겨 모시고 현재까지 봄, 가을로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봉서암은 봉강서원 창건당시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자세한 기록은 없습니다.
1935년 재실이 심히 퇴락되어 당시 봉강재 도유사인 31세손 석훈씨의 노력으로 대구 경보씨(남선직물 사장), 청송 용구씨(전 민의원), 부산 소득씨, 영해 경목씨 등 후손들의 거액의 성금과 기타 전국 각 종문의 성금으로 크게 보수 및 개축,증축을하였습니다. 근래에는 1973년 봉강재 종회장에 취임하신 두상씨 (부산문화관광사장)의 주관으로 봉강재 입구의 차도 확장과 재실 일부를 보수 하였고, 32세 귀보씨 성금으로 태사공 할아버지 묘소 아래 신도비를 건립 했습니다. 1996년 봉강재 종회장 태균씨가 입구 주차장에 대형 신도비를 건립 하였습니다.
태사공 할아버지께서는 경기도 파주군 용연에서 탄강하셨는데, 장지가 고향이 아닌 현재의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입니다. 풍수적인 문제인지, 그때 당시의 정치적인 문제인지, 일신상의 문제인지는 현재로서는 밝혀진 자료가 전혀없습니다.
우리 파평 윤문의 시조 할아버지는 후 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 2등 공신인 벽상삼한익찬공신이 되셨고, 삼공의 하나인 삼중대광태사란 벼슬을 하셨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죽고, 고려 2대왕 혜종이 즉위하여 고려 왕권의 가장 큰 위협의 하나로 남아있던 통일 신라의 도읍지인 동경(경주) 대도독으로 52세에 부임 하시어 81세로 서거 하실 때까지 재임 하셨습니다.
왕족들이 다스리는 도독부의 대도독읋 재임하시는 동안 사기에는 단 한건의 민란이 없었다는 것과, 재임 기간이 30년이나 되었던 것으로 봐서는 고려 왕실의 할아버지에 대한 신임도와 그 뛰어난 목민관으로서의 통치술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충사
여충사의 연혁
공의 묘소는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다. 이곳 사당을 여충사(麗忠祠)라 한다. (국가 사적 33호)
조선 연산조때 양주, 파주, 고양, 세 고을이 왕의 사냥터인 유행소로 정해지고 종파가 미약하였을 때 정승 심지원이 그의 할아버지 묘를 써 놓고 그 후 이어서 수개의 묘를 썼지만 자손들이 선조의 묘소가 어찌 되었는지 모르고 지낸지 수세(數世)에 걸치었다.
조선 영종 23년(서기1747년)에 후손 諱:동규(東奎)가 그의 아들 諱:광로(光魯)와 함께 혼사로 장단 땅에 가다가 분수원에 이르러 선조의 유영(遺瑩)을 잃고 있음을 느끼고 산 위에서 방황할 때 심정승 묘 아래에 큰 무덤이 있으되 분묘의 형상이 깍여져 있고 옛 비석이 하나 서 있는데 이를 가보니 이호문의 비석이었다.
그런데 그 곳 지방 사람들이 말하기를 심정승 묘 아래 큰 무덤은 윤시중 묘이고, 심가가 여기에 투장(偸葬)을 해놓은 후에 비석 같은 일체의 흔적을 없애 버렸다 하여 조족들과 의논하여 이호문의 손자 형진을 붙잡아다가 힐문한 즉, 심가가 이가를 매수하여 상광(上壙)의 이호문 묘라는 것은 허광이요, 아래편이 진광으로서 심가의 변형 총으로서 공의 묘소 상광을 덮쳐 침범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 후 오랜 기간 다툼이 계속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상서대
상서대란? 파평산 동편 아래에 한 촌락이 있고, 거기에 못이 있어 이름을 웅단이라 하는데 이 웅단 근처에 문숙공 어른이 친히 심으신 과목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는데, 공께서 쓰시던 별저(別邸) 일대를 상서대라 한다.
치마대
치마대에 대하여
시조 태사공께서 파주 파평산에서 글과 무예를 닦으셨는데 파평산 마루에서 공이 말을타고 달리시던 곳을 치마대라고 하며, 천 여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그때 길을 닦았던 석축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치마대에는 공께서 훈련중 타고 다니시던 애마가 죽어서 다섯개의 철마를 만들어 놓으셨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 후 어떤 철공이 철마를 무심코 훔쳐 갔다가 즉사 하였다 한다.
그때 같이 갔던 사람이 겁을 먹고 후에 그 자리에 흙으로 역시 다섯개의 철마를 구워다 놓았으나 그 모양이 아주 작아서 말 같지가 않았다고 합니다.
파평산 오른쪽에 보이는 봉우리가 치마대가 있는 곳이다.
편자는 군사작전지역이라 출입이 불가능하다.
낙화암
낙화암에 대하여 문숙공께서 여진 정벌을 마치고 개선하실 때 여진국인 웅단(熊丹) 이란 여인이 따라와서 정성껏 시중을 받들다가 공이 서거하시자 못 위 암석에서 통곡을 하고 뛰어내려 순사(殉死) 하였으므로 그 바위를 낙화암이라 불리게 되었고, 그로부터 웅단이라 이름이 유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