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페이지하단 바로가기

坡平尹氏 昭靖公派蔚山 蘇亭門會

선조인물사

  • 문중소개
  • 선조인물사
  • 1世 始祖 태사공(太師公) 신달(莘達) 시호(諡號)는 소양(昭襄) 이시며, 휘(諱)는 신달(莘達) 이시다.
    신라 진성왕 7년(서기 893년)에 탄생하시어 고려 광종 24년(서기 973년) 81세에 임지(동경대도독부:현.경주)에서 서거 하셨다.
    고려의 개국 공신이신 태사공의 또 하나의 휘는 여신( 辛) 이시다.
    태사공의 유아, 청년 시기는 통일신라의 귀족 사회의 부패와 국왕의 난정으로 국력이 극도로 쇄퇴하여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던 시기였다. 이에 태사공께서 26세(신라 경명왕 2년)에 신숭겸, 홍유 등 동료들과 협력하여 궁예를 무찌르고, 왕건을 국왕 으로 추대하여 백성의 옹호를 얻으니, 이로써 삼한을 통합한 고려 왕조를 수립 하셨다.
    그 후 고려 태조 왕건은 신라를 자주 침범하는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할 때 태사공과 함께 출정을 하였으며, 신라의 경순왕에게도 투항을 받아 삼한을 완전히 통일을 하였다. 고려를 건국한 후 태조 왕건은 삼국을 통일할 때 그 공으로 2등 공신인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公臣) 의 공신호와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의 관직을 받으셨다. 태사(太師)라는 직책은 세자의 스승이라는 직함으로 태부(太傅), 태보(太保) 와 더불어 삼공(三公)의 예우를 받는 정일품의 직위였다.
    고려 건국 후 25년(서기 943년) 태조 왕건이 승하하고 2대 혜종이 등극하여 가장 강력한 반대 세력이 존재하고 있는 신라의 도읍지 동경(경주) 대도독부에 대도독으로 태사공을 임명 하시었다. 당시 태사공의 보령 52세, 부임 30년간 재임 하시다가 81세에 서거 하시었다. 부임할 당시 조정에서는 지방의 제후를 임명함에 아무리 신임하는 신하라 하더라도 그 반란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그 가족들을 인질로 수도인 송경에 남겨 두어 송경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로 인하여 태사공께서도 81세로 서거 하실 때까지 공과 공신공 諱:선지 부자간에 단 한번도 상면할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30년간 신라 유민을 통치함에 있어 단 한번의 반란 사건도 사기(史記)에 보이지 않는 것과, 30년간 유임하심을 보아 누구보다도 뛰어난 통치술을 보이신 목민관임을 헤아릴 수 있다.
    묘소는 경주 기계현 벌치동(현:포항시 기계면 봉계리) 구봉산 아래에 장례를 모셨고, 묘 앞에 표석을 세웠는데 이조(李朝) 중엽 경주의 토호 이지하라는 자가 묘소의 표석을 분질러 땅에 묻고 투장 하였다. 그러나 영조 13년(서기 1737년)에후손 봉정(鳳廷)이 깨어진 비석 한 조각에 대부윤(大夫尹)이란 글씨가 양각된 것을 발견하고 기미년(서기 1739년)에 양쪽을 파헤쳐 선지금강(先之金剛) 이란 넉자의 음기로 된 비석 조각을 얻으므로 확실한 물증을 잡고 경신년(서기 1740년)에 묘표를 세우고 부묘를 다시금 모시고 수호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미년(서기 1751년)에 묘암(墓庵)을 창건하고 제실을 묘(墓) 좌편에 짓고, 제기의물(祭器儀物)을 마련하여 스님을 두고 수호케 하였다.
    이곳을 봉강재(鳳岡齋)라 한다. 태사공의 묘소에는 묘표(墓表)와 묘지(墓誌)가 있는데 묘표는 25대손 이조판서 혜교(惠敎)가 지으시고, 24대손 경주 부윤 휘정(彙貞)이 쓰셨으며, 묘지는 공의 사적과 탄생에 대한 설화를 기록 하였는데 이는 30대손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겸 홍문관부제학태준이 쓰셨다. 그 후 묘소 2리 근방에 봉강서원(鳳岡書院)을 창건하고 공을 향사하여 봄, 가을로 제전을 드리게 하였는데 고종 5년(서기 1868년)에 대원군에 의한 서원 폐지로 철폐되었다. 현재는 한식날에 충향제를 지내고, 음력 10월 1일 추향제를 지내고 있다.

  • 관력은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功臣)이시며,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묘소는 실전 되었으나 후손의 집에 사사로이 기록하여 대대로 전하던 것이 있는데 그 기록에 ‘공의 산소는 풍덕 덕물현(경기도 개풍군 중면 신현리 오릉동) 남쪽 이십오리 중턱의 위 인좌의 언덕에 있는데, 공이 인질로 송경(개경)에 머무르다가 돌아가시자 상여가 경주로 향하여 괘감령 고개를 넘다가 상여 가운데가 부러지기 때문에 여기 장례 되시고, 아들 복야공 산소와 같은 언덕이다.’라고 하나 보책에는 상고할 수가 없어서 증거하여 그렇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조선 정종 3년(서기 1779년)에 25세손인 판서(判書) 諱:숙(塾)께서 오릉동에 일이 있어 가셨다가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경자년(서기 1780년) 5월에 26세 손이신 장령공(掌令公) 諱:경용(慶龍)과 조사를 하여 지석(誌石)을 발견하고 각 종중에 통고하여 재물을 모아 묘와 비석을 고치고 세웠으며, 묘답을 비치하였다.

  • 관력은 상서성좌복야(尙書省左僕射) 정2품 이시다. 묘소는 석현리 선산 10걸음 아래에 있다고 되어 있으나 실전되었다. 2세 공신공의 묘소를 찾을 때 함께 발견되어 고쳐 관리를 하였다 전한다. 관동고사 기록에 의하면 높고 수려한 산과 물을 좋아하여 수시로 금강산에 가셨다. 매년 천리마를 타고 조석으로 날아 다니듯이 다녀 말 발굽 소리가 끊일 날이 없었다고 쓰여 있다. 휴휴당(休休堂) 좌의정(左議政) 홍응문집(洪應文集)에 의하면 금강산의 옛 이름이 개골산(皆骨山)인데 윤금강이 기교하고 아름다운 산수를 너무 좋아하여 작은 정자를 짓고 봄, 가을에 항상 그 곳에 머무르니, 당시에 자주 동행하던 경재(京宰)라는 사람이 그 산의 이름을 금강산이라 고치고 석벽에 시를 새겨 천하에 나타냈다고 전한다.
    또 용연 동쪽에 금강사 유허(遺墟)가 있는데 이를 복야공께서 절을 짓고 승려를 두었다고 한다. 그 곳은 공의 할아버님이신 태사공께서 자라시던 곳으로 지금은 축대 일부와 옛 우물만이 남아 있다.

  • 관력은 검교소부소감(檢校少府少監) 증 상서성우복야(贈 尙書省右僕射) 정2품 이시다. 묘소는 황해도 연백군(구 연안) 호남면 소정리 자달동이다.
    이 묘소 역시 실전되었으나 조선 순조7년(서기 1807년)에 오릉동 공신공(2세 諱:선지) 묘를 찾은 판서(判書) 諱:숙(塾)께서 평산 종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30세손 영원군(鈴原君) 諱:행직(行直)과 상의한 후 종제(從弟) 각(殼)을 보내어 종인(宗人) 평산군수 치검(治儉)의 협조를 얻어 연안 자달동 최가 서당 뒤를 조사한 바 최씨묘 아래 큰 고분을 발견하고 파헤친 결과 석지(石誌:관을 놓기 전에 기록된 돌)를 찾아서 그 영역에 무덤을 만들고 돌아와 문정공(文靖公) 묘 앞뒤에 있는 최씨 묘를 이장할 계책을 세우고 승지(承旨) 함(涵)과 함께 군수에게 알렸다. 해당군수 김복순이 최씨 종손에게 묘를 이장할 것을 권고 하였으나 불응 하였다.
    그리고 9년이 경과한 병자년 4월에 영원군(鈴原君) 諱:행직(行直)은 참판(參判) 諱:상규(尙圭)와 동행하여 평양감사 이면승에게 제소(提訴)하여 최씨묘 70여위와 석물 등을 제거케 하였다. 그러나 최씨의 장손이 장형으로 치사하여 문정공(文靖公) 묘 머리 뒷편에 있는 도선산(都先山) 최희천(崔熙川)의 묘만은 제거하지 못했다.

  • 고려 정종 6년(서기 1040년) 6월1일 태어나셔서 예종 6년(서기 1111년)에 72세로서거 하셨다.
    고려 예종 때 동.북방면에 출몰한 여진족을 섬멸하고 그 곳에 9성을 축조한 분이시다. 검교소부소감 諱:집형(執衡)의 아들이고 시호(諡號)는 문숙(文肅), 자는 동현(同玄) 호는 묵재(默齎)이시다.
    슬하에 7남2녀 장자 지후공(祗侯公) 諱:언인(彦仁)은 합문지후(閤門祗候)이시며, 둘째 諱:언순(彦純)은 남원부사, 셋째인 諱:언암(彦巖)은 흥왕사 주지, 넷째는 諱가 전하여지지 않으나 선사(禪師)이시고, 다섯째인 복야공(僕射公) 諱:언식(彦植)은 좌복야(左僕射)이시고, 여섯째인 문강공(文康公) 諱:언이(彦 )는 정당문학(政堂文學)이시며, 일곱째 諱:언민(彦旼)은 상의봉어(尙衣奉御)로 서화의 명인이셨다. 문숙공 諱:관은 어려서 책을 좋아하여 손에서 떼어 놓지 않았으며, 문종 27년(서기 1073년)에 진사과에 급제하고 다음해 4월 대과에 급제하시었다. 또 왕명 세자복시에 문과 장원으로 뽑히시어 장사랑(將仕郞) 비서동정(秘書同正)이 되셨다.
    선종 5년(서기 1088년) 합문지후(閤門枝候)로 경기도 광주와 충청도 충주 등지에 출추사(出推使)로서 파견되어 국가의 중요한 일을 맡아 능력을 발휘한 일이 있어 기대를 걸게 한바 있다. 헌종 원년(서기 1095년) 10월 좌사랑중으로 헌종의 종표 즉, 왕께서 병으로 정사를 볼수 없어 신왕께 양위 한다는 뜻의 글을 가지고 요나라에 파견되어 외교 활동을 전개 하시었다. 그로부터 3년 뒤 숙종 3년(서기 1098년) 7월에는 동궁시강학사로 조규(趙珪)와 같이 송나라에 가서 왕의 사위(嗣位)를 통지 하였다. 이처럼 두번이나 외국에 나가 고려를 대표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능력이 인정 되었기 때문이다. 다음해 자치통감(資治痛鑑)을 기증 받고 귀국한 뒤 이를 국왕께 헌상하여 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숙종 6년(서기 1101년)에 벼슬이 누진되어 추밀원주지사가 되셨고, 이어서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事), 어사대부 지추밀원사겸 한림학사 승지를 거쳐 숙종 9년 2월에 동북면 행영병마도통사(行營兵馬都統使)에 임명 되었다. 이 때부터 공이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전후 7년간이 여진 정벌 등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화려한 전성기라고 할만 하다.
    숙종 9년(서기 1104년) 3월 국왕으로부터 결의를 다짐하는 뜻으로 부월(斧鉞:출정하는 대장에게 임금이 손수 주시던 도끼)을 받으시고 여진 정벌을 결행 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전황은 너무나 일방적으로 고려에 고배를 안겨 주었다. 패퇴하여 정주 성으로 물러난 윤관 장군은 여진 부족장과 화의를 맺기는 했으나 치욕적이었다. 공은 패배한 원인이 적의 기병을 보병으로 극복한다는 엄청난 전술 전략의 차이점이라 지적하고 유비 무한의 전투력 증강과 기병의 훈련을 강력히 진언 하였다. 그리하여 신설된 것이 별무반(別武班) 이었다. 그의 편제는 신기(神騎), 신보(神步), 특과대(特科隊)의 3부로 나누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신기군 이었다. 말을 가진 자는 신기군으로, 말(馬)이 없는 자는 신보군으로, 그밖에 도탕(跳蕩), 경궁(梗弓), 정노(精弩), 발화(發火) 등을 각군에 배치하고 문무산관 이서와 모든 상인, 비복들도 동원하여 편입 시켰으며, 승려들도 항마군에 편성하여 거국적으로 국력 확충에 심혈을 기울였다.
    예종 2년(서기 1107년)에 전군을 4로(路)로 편성하여 역사적인 여진 정벌을 하였다. 135처의 전략 지점에서 적군 약 오천명의 목을 베고 130여명을 생포 하였으며, 기타 전리품을 노획하는 큰 성과를 올렸고, 그 곳에 9개의 성을 개척하고 남도민을 이곳에 정착 생활을 하게 하였으니 그 9성은 함주, 영주, 웅주, 복주, 길주, 공험진, 숭녕진, 통태진, 진양진 이었다.
    공의 묘소는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다. 이곳 사당을 여충사(麗忠祠)라 한다.(국가 사적 33호) 조선 연산조때 양주, 파주, 고양, 세 고을이 왕의 사냥터인 유행소로 정해지고 종파가 미약하였을 때 정승 심지원이 그의 할아버지 묘를 써 놓고 그 후 이어서 수개의 묘를 썼지만 자손들이 선조의 묘소가 어찌 되었는지 모르고 지낸지 수세(數世)에 걸치었다.
    조선 영종 23년(서기1747년)에 후손 諱:동규(東奎)가 그의 아들 諱:광로(光魯)와 함께 혼사로 장단 땅에 가다가 분수원에 이르러 선조의 유영(遺瑩)을 잃고 있음을 느끼고 산 위에서 방황할 때 심정승 묘 아래에 큰 무덤이 있으되 분묘의 형상이 깍여져 있고 옛 비석이 하나 서 있는데 이를 가보니 이호문의 비석이었다. 그런데 그 곳 지방 사람들이 말하기를 심정승 묘 아래 큰 무덤은 윤시중 묘이고, 심가가 여기에 투장(偸葬)을 해놓은 후에 비석 같은 일체의 흔적을 없애 버렸다 하여 조족들과 의논하여 이호문의 손자 형진을 붙잡아다가 힐문한 즉, 심가가 이가를 매수하여 상광(上壙)의 이호문 묘라는 것은 허광이요, 아래편이 진광으로서 심가의 변형 총으로서 공의 묘소 상광을 덮쳐 침범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 후 오랜 기간 다툼이 계속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또한 파평 윤씨의 파(派)는 문숙공 이후부터 분파가 되기 시작 한다. 장자이신 지후공 諱:언인(彦仁)의 후손은 11세에 가서 함안파(咸安派)와 남원파(南原派)가 생겨 났으며, 다섯째 아드님이신 복야공 諱:언식(彦植)의 후손은 덕산군파(德山君派)가 생겨 났으며, 여섯째 아드님이신 문강공 諱:언이(彦 )의 후손에서 13개 파(派)가 생겨 났다.

  • 고려 의종 3년(서기 1149년) 60세로 서거 하셨다. 시호(諡號)는 문강(文康), 자는 원로(元老), 문숙공 諱:관의 6자로 태어 나시었다.
    슬하에 6남 1녀로 장자는 諱:인첨(鱗瞻)으로 임자년에 진사과에 급제, 둘째는 직사관(直史館)으로 諱는 자고(子固) 갑자년에 진사과에 급제, 셋째는 상식직장동정(尙食直長同正)으로 諱는 돈신(惇信) 정묘년에 진사과에 급제, 넷째는 상의직장동정으로 諱는 자양(子讓), 다셋째는 군기주부동정으로 諱는 돈의(惇義), 여섯째는 조계종 중 대사로 諱는 효돈(孝惇) 계해년에 상품(上品)에 크게 선발, 일곱째는 요서 하셨다.
    공은 일찍이 벼슬에 올라 동북면행영병사로 나아가 사령을 시작으로 산정도감판관이 되시었다. 그 후 진사 일등급에 급제하여 금오위논사 겸 보문각교감, 한림원직, 지제고로 승진 하시었다. 그리고 고려 인종 임금의 명으로 대궐에 들어 가시어 여러 관직을 거쳐 동궁시강학사, 보문각직학사를 거쳐 우간의 대부로 자리를 하시었다. 이때 대각국사 비문을 짓는 과정에서 김부식(金富軾)이 공을 못마땅히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임금이 마침 국자감에 행차 하시어 김부식에게 역(易)을 강론하고, 공을 시켜 이를 토론케 하였는데, 공이 김부식을 월등히 능가하여 김부식은 공에게 앙심을 품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고려에 묘청 백수한이 난을 일으켜 임금이 김부식, 임원애를 장수로하고 언이를 참모로 하여 진압케 하였다. 이를 진압 후 김부식은 언이가 정지상과 음모를 꾸민다며,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임금에게 아뢰어 공은 귀양을 가시게 되었다. 임금은 언이의 충성을 알고 있었으나 유사들이 굳이 고집하여 가까이 하시지 못하였다.
    그러나 인종 임금은 귀양 후 공을 양주방어를 거쳐 광주목사로 자리를 옮겨 권도로 잠시 부임하도록 하시었다.
    그 후 의종 2년 나라의 원로를 요직에 임용함에 있어 공에게 은청광록대부정당문학판상서형사부의 직을 내리시었다. 공은 이를 감사히 여기시고 임금께 절하여 사양을 하였으나 임금은 그를 부임케 하시었다. 부임 후 도(道)를 잘 다스리시어 이듬해에 중군병마판사 겸 동북면행영병마판사의 직을 더하셨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공은 세상을 떠나시었다. 이때 의종 임금은 공의 운명을 슬퍼하시어 사흘간 조회 보시는 것을 폐하시고 유사에게 명하시어 호상하도록 하고, 은청광록대부수사공중서시랑 평장사판서형사부사주국을 증직케 하시었다. 또한 시호를 문강(文康)이라 하사하시고, 공신(功臣)으로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으로 불리웠다. (시호는 文 曰 間好學勤 / 康 曰 通流源淵 의 뜻으로 하사 하시었다)
    묘소는 임강현 용봉산 숭복사 동쪽마루에 장사 지내셨으며, 문숙공의 능침과 같은 경내에 있다.
    공께서는 문장이 공교하고 일찍이 역해(易解)를 지어 세상에 전하였으나 만년에는 불법을 좋아하고, 청노(請老)하여 물러가 파평에 살면서 스스로 금강거사(金剛居士)라 하시었다.
    또한 공의 장자이신 문정공 諱:인첨(麟瞻)의 후손은 문정공파(文定公派)로 분파 하였으며, 둘째 아드님이신 박사공 諱:자고(子固)의 후손은 신령군파(新寧君派)로 분파 하였으며, 셋째 아드님이신 시랑공 諱:돈신(惇信)의 후손으로 11개 파(派)로 분파 되었다.

  • 문강공 諱:언이의 3자 이시다. 자(字)는 우경(友卿)이시고, 관직은 중봉대부(中奉大夫) 상서이부시랑(尙書吏部侍郞) 동궁내시강학사(東宮內侍講學士)를 거치시었다. 슬하에 諱:상계(商季), 諱:상영(商英) 두 형제를 두셨다. 고려 인종조 문과에 올라 맑은 덕망과 문장이 최포(崔褒) 등과 함께 명성을 나란히 하시었다.
    고려 의종 19년(서기 1165년) 12월에 이부상서 이지심(李知深)과 중서사인(中書舍人) 윤돈신을 파견하여 존호(尊號)를 하례 하였다고 되어있다. 송나라와 금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금나라 세종대정 5년에 중서사인인 공을 보내어 표로서 존호를 하례 하였는데 이는 송나라가 아니라 금나라의 존호를 하례한 것이다.
    의종 24년(서기 1170년)에 의종이 종사 돌보기를 등한시하고 문관들을 편애하는 것을 불만하던 정중부를 위시한 무관들이 난을 일으켰다.
    이것이 정중부의 난으로 “머리에 문관을 쓴자는 위로는 정승, 아래로는 서리(胥吏)에 이르기까지 종자를 남기지마라”고하며, 닥치는데로 문관을 살육하였다. 이때 공께서도 참변을 당하시었다.
    묘소는 장단 임단 석주원 남향원(長湍臨湍石注院南向原)이라고 자손 사록에 되어 있으나 실전되어 추원단(追遠壇)에서 제향을 받든다.

  • 시랑공 諱:돈신의 장자 이시다.
    자(字)는 수익(受益)이시고, 문과에 등용되어 서경부유수(西京副留受)를 지내시었다.
    슬하에 諱:복원(復元), 諱:복장(復璋), 諱:복규(復珪) 세분이 계신다.

  • 유수공 諱:상계의 장자 이시다. 슬하에 諱:순(純) 외아들을 두셨다.
    고려 신종조 문과에 오르셨으나 그때 당시에 권력있고 간사한 무리들이 나라 정치를 전횡(專橫)하여 조야가 소연하므로 공은 지위에 구애 받지 않고 조정의 혼란 속에 끌려 들지 않도록 조심하시면서 처신을 하시어 많은 세월을 초야(草野)에 계시었다. 그로 인하여 공께서는 태상부녹사(太常府錄事) 이외에는 뚜렷한 관직이 없으셨다.
    그 후 공의 손자이신 문현공(文顯公)께서 귀해 지심에 할아버님이신 공의 관직도 추증(追贈:돌아가신 후 벼슬을 보냄)하여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 상서성 좌복야(尙書省左僕射) 한림학사로 되시었다.
    묘소는 자손사록에는 덕현 남일리자원(德峴南一里子原)이라 하나 실전되고 없어 추원단에 그 비위를 모셨다.

  • 녹사공 諱:복원의 외아들 이시다. 슬하에 문현공(文顯公) 諱:보(珤) 외아들을 두시었다.
    문과에 등용 되시어 감제어사 증은청광록 대부수 태위문하시랑 평장사 판상서 형부사(監祭御史 贈銀靑光錄 大夫守 太尉門下侍郞 平章事 判尙書刑部事)를 지내시었다. 묘소는 실전되고 없고, 추원단에 그 비위를 모셨다.

  • 고종 39년(서기 1252년)에 탄생하시어 1329년에 웅담정사에서 서거 하시었다. 슬하에 諱:계종(繼宗), 諱:안척(安 ), 諱:중조(中 ), 諱:안숙(安淑), 諱:암( ), 諱:안비(安庇) 6형제를 두셨다.
    충렬왕 2년(서기 1276년)에 이익방(李益邦)의 방(榜)에 의한 문과에 등과하여 장사랑비서동정(張仕郞秘書同正)에 제수 되시었다. 충렬왕 4년 담사성 녹사(擔事省錄事)에 배임되시고 필도지(:몽고의 벼슬이름)에 발탁되어 좌사사의대부(坐司司議大夫) 보문서직학사지제고(寶文署直學士知製誥)에 배임 되시었다. 충렬왕 22년 밀직사(密直司) 좌승지로서 국가시(國家試)를 관장하시고, 23년 직밀사학사(直密司學士)에 배 하시고, 24년 홍문학사의 조상서(弘文學士儀曹尙書), 밀직사부사, 성균관대사성, 수문전학사에 배 하셨으며, 7월에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가 되시었다.
    그러나 충렬왕 25년에 고려의 사정은 원나라의 세력이 우리나라를 침투하여 압력을 가하고, 몽고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고문격으로 모든 정치를 간섭 하였던 시기이다. 이러한 정국에서 몽고 사람 인후 등에게 아첨하는 매국노들이 있었다. 이들이 공을 모함하여 서북면도지휘사에서 파면을 당하셨다.
    그러나 충렬왕 33년에 밀직사부사에 배 하시었다가 판선부사우문관대제학에 배 하시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충선왕 원년에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를 계속해서 밀직사부사, 성균관대사성(城均館大司城), 문관학사직학사를 배 하시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후대 왕손인 충숙왕 때에도 의주상서(儀注尙書), 우문관대제학 겸 판선부사(右文館大提學兼判選府事), 첨의찬성사(僉議贊城事), 첨의찬성 치사(致仕) 이후 최고의 관직인 첨의정승(僉議政丞) 자리에 오르시었다.
    그 후 파주 파평산중 웅담정사(熊潭精舍)에 은퇴 하시었다가 충숙공 16년에 78세로 돌아 가시었다.
    묘소는 장단부 치동면(長湍府治東面) 30리 고현 작고곡 갑좌원(古縣作古谷甲坐原)에 부인과 함께 쌍분으로 모셨다.
    또한 공의 둘째 아드님이신 대언공 諱:안척의 후손은 대언공파(代言公派)로 분파 하였으며, 셋째 아드님이신 봉록공 諱:중조의 후손은 봉록군파(奉祿君派)로 분파 하였으며, 넷째 아드님이신 양간공 諱:안숙의 후손은 우리 소정문을 포함한 7개의 파로 분파 하였으며, 다섯째 아드님이신 소부공 諱:암의 후손은 소부공파(少府公派)로 분파하고, 여섯째 아드님이신 태위공 諱:안비의 후손은 태위공파(太尉公派)로 분파 하였다.

  • 문현공의 넷째로 태어 나시었으며, 슬하에 諱:리( ), 諱:척(陟), 諱:거충(居忠), 諱:득인(得仁) 네명의 아드님을 두셨다.
    충숙왕 14년(서기 1327년) 왕이 하교하여 말씀하시기를 “과인이 도성(원나라 도읍지)에 5년이나 있는동안 간신들이 나라를 옮기고 음모 하였으나, 시종한 신하들이 충절을 다하여 끝내 한마음 한뜻으로 보좌 하였기에 그 공을 기록한다.”고 하셨다. 이때 공신에 책공(策功)한 분은 전답과 노비를 내리고 부모, 처자에게도 벼슬을 내렸다. 이에 양간공께서도 공을 인정 받으시었다.
    충혜왕의 왕비 윤씨(공의 형 계종의 딸)는 아들 저(低)를 낳았으나 그가 원나라에 가있었다. 그리고 다음 왕조인 충목왕이 승하 후 아들이 없어서 공과 이제현(李齊賢)이 저(低)를 왕위에 올리니 그가 바로 충정왕 이시다.
    고려사에 의하면 윤신걸로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삼고, 윤안숙으로 추성좌리공신 삼사좌사(推誠左里功臣 三司左事)를 삼고, 윤시우로 순성협덕 찬리공신(純誠協德贊理功臣)으로, 좌우부대언(左右副代言) 윤침으로 순성보리 익위공신 영평군(純誠輔理翊衛功臣鈴平君)으로 봉하고, 윤인귀로 전리판사(典理判事)로 삼았다고 되어있다.
    또한 공은 충정왕 원년(서기 1349년)에 추성 좌리공신 호를 받은 후 삼사좌사에 배 하시고, 첨의사사찬성사(僉議事司贊成事)를 배 하시었으며, 삼중대광영평부원군(三中大匡鈴平府院君)에 봉함을 받으셨다.
    충정왕조때 공은 諱:식계, 諱:시우와 더불어 삼재(三宰) 하였고, 계종공의 아드님 諱:인귀(仁貴), 諱:안비공의 아드님 諱:침( ), 그리고 공의 아드님 諱:리( )와諱:척(陟), 손자 사위들이 모두 빛나는 관직과 재상의 지위에 있었으며, 도첨의(都僉議) 한대순(韓大淳), 정당문학 한중례(韓衆禮) 형제도 또한 공의 처외종들이라 사람들이 그 영화를 시기 하였다.
    공의 묘소는 장단부 동강남면 밀암손원(長端府東江南面密岩巽原)에 합장하고 표석이 있는데 속칭 말하기를 구절비룡(九折飛龍)이라 한다. (여지승람에의함) 이 묘소는 원래 학사 주당이라는 사람이 있어 그분이 난리를 피하여 중이 되어 돌아다니다가 공의 댁에 와서 유숙하고 있었는데, 공이 보시기에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아시고 항상 우대하였더니 주당이 공을 위하여 복된 자리를 구하여 말하되, 이는 구절비룡 즉, 나르는 용이 아홉번 꺽이는 형상이니 권세가 9대를 이를 것이며, 영화가 빛날 것이라고 하였다. 공이 하세(下世)하시자 여기에 장례를 모셨다.
    또한 장자이신 판서공 諱:리( )의 후손은 판서공파(判書公派)와 야성군파(野城君派)로 분파 하였으며, 둘째 아드님이신 영평군 諱:척의 후손은 소정공파를 포함한 5개 파로 분파 하였다.

  • 양간공 諱:안숙의 두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셨으며, 슬하에 5남2녀를 두셨는데 장자 諱:승휴(承休)는 판전의시사(判典儀侍事)요, 諱:승도(承度)는 판한성사(判漢城事)요, 諱:승순(承順)은 문하평리(門下評理)요, 諱:승경(承慶)은 삼사좌윤(三司左尹)이요, 諱:승례(承禮)는 판도판서(版圖判書)다. 따님은 그 사위가 정당문학 이보림(李寶林), 개성유수(開城留守) 안원(安援)이다.
    충정왕 2년(서기 1350년)에 우부대언(右副代言)에 배 하시고, 공민왕때 원수 안우 그리고 최영, 이성계 등이 홍두적 사유관(홍건적의 난)을 격파하고 이를 참한 후 서울을 수복할 때, 공은 군부전서(軍簿典書)로 정벌에 종군하시어 공(功)이 있으므로 성익대보리공신(成翊戴輔理功臣) 2등으로 책봉되어 영평군(鈴平君)에 봉 하고 전답과 물품을 하사 받으셨다. 또한 부모는 3등 봉작이요, 그 아들은 7품관을 받으셨다.
    공의 관력이나 행적은 세상에 전해짐이 없으나 파평읍지 인물에 고려 윤척이라 하였고, 윤척은 안숙의 아들로서 관직이 영평군에 이르렀다고만 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공은 우왕 10년에 돌아가시어 고려사에 의하면 장단동 저가사리경원(長端東猪加士理庚原)에 장례를 모셨다.
    또한 공의 장자이신 전의공 諱:승휴의 후손은 전의공파(典儀公派)로 분파 하였으며, 셋째 아드님이신 충간공 諱:승순의 후손은 소정공파를 포함한 3개의 파로 분파하고, 다섯째 아드님이신 판도공 諱:승례는 판도공파(版圖公派)로 분파 하였다.

  • 영평군 諱:척의 3째 아들로 태어나셨으며, 슬하에 諱:곤(坤), 諱:목(穆), 諱:향(向) 3명의 아드님을 두셨다.
    일지기 과거에 오르시어 형님 전의공 諱:승휴(承休)와 공민왕조에 벼슬을 하시어 영화를 누리셨다. 공은 요승(妖僧) 신돈(辛頓)이 권세를 부리면서 횡학을 제멋대로 하지만, 감히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시절에 여러번 벼슬을 바꾸면서 응양군상호군 겸 군적전서(應揚軍上護軍兼軍籍典書)가 되셨다. 그리하여 공민왕 16년(서기 1367년)에 공이 지도첨의(知都僉議) 오인택과 상호군(上護軍) 조린, 전시중(前侍中) 경천홍, 판소부사(判少府書) 강원보 등과 함께 신돈을 없앨 것을 밀의 하였으나, 그 후 이일을 강원보가 판사(判事) 신귀와 만나 누설하니 신돈이 이일을 알고 왕에게 간사한 말로서 아뢰었다. 이에 왕이 명령을 내려 공과 오인택 등이 순군(巡軍)에게 검거되어 국문(鞠問:심문)케 하였다. 11월에 형장(形仗:볼기)을 맞고 오인택과 공, 그리고 조린이 각기 유배 되었다. 그 후 조린은 다시금 신돈을 처단하려다 죽음을 당하였다. 공이 적소(適所:귀향 가 있는곳)에 계시는 동안 신돈이 과연 왕을 시(弑:왕을 죽임) 하자는 음모를 꾸미다가 참을 당했다. 왕이 크게 깨닫고 공을 배소(配所:적소와 같은 말)에서 불러 다시금 상호군을 배 하셨다. 공이 돌아오시어 장사 지내지 못한 조린의 시신을 찾아 뼈를 추려 장사 지내니, 듣는자 마다 감탄치 않는자 없었다 한다. 그 해에 수충양절보리공신(輸忠亮節輔理功臣)에 책록(策錄)되시어 영평군을 봉 하시었다.
    우왕 원년에 경상도 부원수가 되셨는데 8월에 왜구(倭寇)가 호남의 낙안, 보성 등 군에 침입함에 공이 군사를 움직이시어 이를 쳐서 26급을 목잘랐다. 정사년에 계림(鷄林:경주) 부윤이 되시었을 때 왜구가 언양현에 침입하여 민가를 불사르고 약탈함에 공이 또 이를 쳐서 4급을 참하는 공을 세우셨다. 공이 여러번 왜구를 쳐서 무찌르니 계림에 2년간 계시는 동안 변방을 경계치 않아도 좋을 정도라 군사들이 편안 하였다. 공이 이 동안에 백율사서루(柏栗師西樓)를 중수하시고 유림할 수 있도록 단장 하시니 진사 김사경이 현판을 써서 더욱 아름다웠다고 여지승람에 전한다. 우왕 5년(서기 1379년)에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배 하셨는데, 당시 권세있는 간신인 이인임(李仁任), 최영(崔塋) 등이 함께 찬성사(贊成事) 양백연을 미워하여 최영이 무고하여 왕에게 아뢰기를 “양백연이 두 시중을 모해하고 자기가 수상이 되고자 한다.”하고 왕에게 치죄를 청 하였다. 이에 많은 중신들이 화를 당하였다. 이때 공도 체포, 하옥되어 형장 후 유배 되시었다. 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죄가 놓여 돌아 오시었다.
    우왕 10년 아버님 영평군의 상을 당하시고, 기사년에 문하평리(門下平理)에 배 하시며, 그 해에 사신으로 명나라 서울을 가셨는데 양촌(陽村) 권근이 부사가 되었다. 9월에 명 나라로부터 귀국하시어 개성 부사로 전임 되셨다가 임신년 정월 11일에 세상을 떠나셨다. 이조(李朝)에 내려와서 의정부 좌정승(議政府左政丞) 영평부원군에 추증 되셨고, 시호를 충간(忠簡)이라 하셨다. 공의 묘소는 장단 저가리(長湍猪加里)라 하고 삼배동(三倍洞)이라고 하지만 실전되고 지금은 추원단에 모셨다.
    또한 공의 장자이신 소정공 諱:곤(坤)의 후손이 우리가 소속된 소정공파(昭靖公派)로 분파 하였으며, 둘째 아드님이신 원평군 諱:목(穆)의 후손은 원평군파(原平君派), 셋째 아드님이신 소도공 諱:향(向)의 후손은 소도공파(昭度公派)로 분파하여 우리 파평 윤씨의 파는 총 16개 파로 이루어져 있다.

  • 충간공 諱:승순의 장자로 태어나셨으며, 슬하에 諱:희이(希夷), 諱:희제(希齊),諱:삼산(三山), 諱:석노(石老), 諱:가노(加老), 諱:석년(石年) 6형제를 두셨다. 공은 일지기 아우님이신 소도공(昭度公) 諱:향(向)과 함께 등제하시었다.
    이태조 7년(서기 1398년)에 대장군이 되시고 정종(定宗) 2년에 역신(逆臣)박포가 방간 부자(父子)를 끼고 정종과 태종(당시 정안군)을 제거코자 군사로써 대궐을 범하므로 공은 상장군 이저(李佇) 등과 함께 태종을 도와 토벌하여 진압 하였다. 태종이 보위에 오른 원년(서기 1401년) 정월에 추충익대좌명공신(推忠翊戴左命功臣)을 책훈(策勳)하시고, 공으로써 의흥삼군 우군 동지총제(義興三軍右軍同知總制) 3등 제 7인에 녹(錄)하여, 파평군(坡平君)으로봉한 후 충성을 다하여 힘을 쓰셨다는 것으로 교지(敎旨:왕이 내리는 문서)로 표창을하고, 부모 처자에게 직함을 내리고 동시에 전답과 노비, 은, 비단 등을내리셨다. 뿐만 아니라 둘째 아우님 목(穆)은 4등에, 막내 아우님인 소도공 향(向)도 또한 높고 빛나는 벼슬에 계시니 그 훈벌이 두드러지게 영화로웠다.
    그 후 공은 사신으로서 명나라 서울에 가시어 태종이 사위(嗣位)를 받았다는 것을 고하는 뜻을 전달하고 돌아오심에 왕은 말을 내려 주시고 청화정(淸和亭)에서 위로연을 베푸시고 또 전답과 노비를 내리셨다. 얼마 후 사건에 관련이 되어 파평 고향으로 귀양을 가시었다. 이 사건이란 공이 명나라에 가셨을 때 명나라에서 우리나라 산(産) 말을 교역하자는 의논이 성립되어 상마는 비단 네필이요, 중마는 견직 10필로 정하였던 것인데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말의 숫자를 모자라게 계산하여 청산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서 공은 그 죄를 묻게 되어 붙잡히고 우사(右使) 이직도 죄로서 다스리었다. 임금이 공에 대하여서는 벼슬을 파면만 하도록 명 하고 대간(臺諫)들의 말을 쫓아 고향에 안치(安置:귀양의 일종으로 그 지역 밖을 나가지 못함) 보내었다가 얼마가지않아 놓이시었다.
    무자 4월에 사신으로서 명나라에 가셨으니 이번은 사은사(謝恩使)로 가신 것이다.
    세종이 즉위 하신 후 공은 평안도 관찰사(평양감사)를 배 하셨다. 공이 부임 하시고자 하실때 양궁(兩宮:왕과 왕비)께서는 친히 침전(寢殿:왕이 자는 방)에 부르시어 연석(宴席)을 베푸시고 전송 하셨으니 왕께서 공을 얼마나 우대 하셨는지를 엿볼 수 있다. 공은 평안도에 가신 후 상소를 올려서 기악(妓樂)을 없애시고 풍속과 교화를 바로 잡으시라고 건의 하셨고, 공도 이를 실천 하셨다. 공은 그 후 이조 판서로 종 1품에 오르시고 후에 우참찬을 배 하셨다.
    세종 4년 3월 11일에 자택에서 별세 하시니 왕이 들으시고 3일간 조회를 폐하시고 슬퍼 하셨다. 양궁(왕과 왕비)께서는 다른 외지에 행차 하셨는데 거기서육류(肉類)의 찬을 잡숫지 않으시니 신하들이 고하여 육류를 잡숫게 하였으나, 왕께서 이르시길 “임금이 대신 죽은 것을 듣고 찬을 감하는 일이 없지마는옛법에 신하가 임금을 위하여 3년상을 지내고 임금이 신하를 위하여 3일간 고기 반찬을 먹지 않는 법이 있다”고 하시었다. 태종 임금께서는 내시 김귀중을보내시고 왕께서는 예관을 보내시어 제사케 하셨다. 시호를 소정(昭靖)이라 내리셨다.
    공은 고려 혁명 이후 이조에 벼슬을하시어 나라에 훈공을 세우시고 공신호까지 받은 영광을 누리셨으나 마음속에는 항상 고려를 사모하시고 절의를 존중히 여기시어 아들 3형제의 이름을 희이, 희제, 삼산으로 지으셨다. 이는 백이(伯夷), 숙제(叔齊)와 같은 절조를 바라는 뜻이며, 삼산은 수양산(首陽山)의 일명이기 때문에 명명 하시었다.
    공의 묘소는 파주 치동(治東) 5리 용지동(龍池洞:지금의 용주골)에 장례를 모셨다.
    그 후 공의 종손이 8世에 이르러 대가 끊어져서 9세손 대사헌 諱:문거(文擧), 10세손 판서 諱:강(降) 등이 서로 공의 후사를 상의 하였는데 종사가 이미 없어 계승할 사람이 없으면 지파(支派)에서 정하기로 하고, 연명으로써 조정에 보고 하였더니 즉시 허가가 되어 공의 둘째 아드님 계통의 9세손 승지 諱:비경(飛卿)으로써 공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이 일이 효종때이며 비경공께서는 모든 종인을 거느리고 새 사당에 정성껏 제사를 받들었고, 그러므로 다시금 뒤를이어 국가의 유공한 어른의 종사(宗祀)를 계승하여 받들게 된 것이다.

  • 홍무13년(서기 1380년)에 태어 나셨으며 88세에 돌아 가셨다. 소정공 諱:곤(坤)의 2자이시며 슬하에 배천공(白川公) 諱:경(坰 )이 계신다.
    벼슬은 정헌대부호조판서, 보국순록대부의정부좌찬성판한성부사로 증자 되시었다.
    묘소는 양주군 남면 입암산 축원유혈에 합장하셨다. 한때 잃어 버렸으나, 숙종37년 겨울, 연천에 사는 종인 원교(元敎)가 산소자리를 구하려고 산밑에 이러르 단표하나를 얻어본즉 세 조각으로 깨어져 있어 모아보니 공의 휘, 벼슬하신것, 배위 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모든 후손들에게 통고하여 영역을 개수하고 재전을 만들었으며 병조판서를 지낸 후손 지인(趾仁)이 묘표를 세웠다.

  • 태종 3년(서기 1403년) 태어 나셨으며 성종 1년(서기 1470년)에 돌아 가셨다.
    한성공 諱:희제(希齊)의 장자이시다. 공이 소시적에 술에 취하시어 꽃나무 아래에서 잠이 드셔서 나무 한그루에 꽃이 네송이 핀 꿈을 꾸시니 꽃 둘은 피었으나 시원치 않고 세째 꽃이 가장 아름답게 피었는데, 돌연 광풍이 불어 꺽이었고, 그 꽃이 꺽일때 네째 꽃이 상했다. 이러한 꿈을 꾸신 후에 諱:보상(輔商), 諱:우상(佑商), 諱:필상(弼商), 諱:흥상(興商) 4분을 두셨다.
    벼슬은 배천군수(白川郡守) 추충적덕병의보조공신(推忠積德秉義輔祚功臣)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시고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에 봉하시었다. 묘소는 개성 북면 일삼소리 춘명산묘원

  • 세종 12년(서기 1430년)에 태어 나셔서 80세에 돌아 가셨다. 자(字)는 성좌(聖佐) 호(號)는 영은(永隱)이시며, 배천공 諱:경의 4자이시다. 슬하에 諱:인(仁), 諱:부(傅), 諱:1)홍(弘), 諱:길(佶), 諱:보(保), 諱:2)혁(赫), 諱:3)명(名), 諱:준(俊), 諱:신(信), 諱:전(傳), 諱:덕양(德陽), 諱:덕원(德源), 12분이 계신다.
    공의 형님이신 영상공께서는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셨지만 연산군 갑자 사화때화를 당하시어 비명에 돌아가시고, 공은 갑자사화 이전에 통정대부돈녕도정증이조판서로 벼슬을 그만 두시고 공이 고향에 돌아가서 비봉산아래 서당을 지어놓고 이름하여 영은당이라 했고, 또한 분토산밑에 한집을 지어 백직제라 이름하여 배우는 사람과 함께 경사를 토론하시고, 간혹 거문고와 술과 시로서 취미를 삼으시고, 한가한때는 배로써 앞내에서 선유하시니 보는 사람마다 모두 선옹이라 하였다.
    세째아드님이 귀하게 되시어 정헌대부 이조판서로 추증되셨다. 그러나 연산군 갑자사화로 공과 공의 둘째, 세째 아드님은 귀양을 가셨다. 또한 연산군은 영은공의 아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전 가족을 몰살 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다른 가족은 전국 각처로 피난을 하고, 성씨를 바꾸는 등 난을 피하였다.
    그 후 공과 아드님들은 중종 반정으로 모두 풀려 나셨으며, 그 후 80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묘소는 안성군 보개면 구사곡 신원합장. 한때 잃어 버렸으나 서기 1798년(정조22년) 에 찾아 보호하고 1994년 표석을 세웠으며, 1998년 4월4일 낭장공諱:혁( )의 후손인 주팔(소정문중)이 비석을 세웠다. 매년 음력 시월 초엿새에 묘소에서 추향제를 지낸다.
    참고 : 1), 2), 3)한자앞에 사람인(人)변이 빠짐

  • 벼슬은 보승랑장(保勝郞將)이 시다. 갑자사화때 연산군의 체포령을 피하여 전국 각지로 흩어진 영은공 할아버지의 열두 아드님들중 우리 소정문중의 직계 할아버님이신 여섯째 諱:혁( ), 일곱째 諱:명( ), 아홉째 諱:신(信), 열째 諱:전(傳) 4형제는 남쪽으로 내려 오셨다. 공과 일곱째 諱:명( )자 할아버님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읍 동상리 상회에 정착 하셨으며, 얼마 후 諱:명( )자 할아버님은 상회에서 울산광역시 북구 화봉동 사청으로 옮기시었다.
    이로써 낭장공 諱:혁( ) 어른은 우리 문중의 입향조이시다. 그 후 공의 증손대에 와서 장증손 諱:희평(希平) 할아버님의 후손은 상회문중이 되었으며, 우리 소정 문중의 큰집이고, 차증손 諱:희륜(希倫) 할아버님이 소정문중의 어른이 되시었다.
    묘소는 온양면 서포(현 울주군 온양면 동상리)에 있다.
    또, 아홉째 諱:신(信)자 할아버님은 더 나아가 경주시 서면 가척에 정착 하셨고, 열째 諱:전(傳)자 할아버님은 부산 용호동에 정착 하셨는데 현재 울주군 삼남면에 쌍수문중으로 일부 후손이 살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