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坡平尹氏 昭靖公派蔚山 蘇亭門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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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윤씨 판도공파 인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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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주 댓글 0 조회 8,553 작성일 06-01-20 14:18

본문

판도공파는 본 파평윤문의 16계파중 본 문중의 소정공파와 양대 계파를 이루며 이 두파가 전체대한민국 파평윤씨의 80%이상을 차지할 정도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판도공파만을  ㄱ,ㄴ,ㄷ 순으로 정리했습니다
윤  개(尹  漑)  (1494~1566)  판도공파.
조선시대의 문신. 자 여옥(汝沃). 호 회재(晦齋). 김안국(金安國)의 문인.
1516년(중종 1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에 관련되었으나 중국말을 잘하였으므로 외직에 좌천되는 것으로 그쳤다.
1545년(인종 1) 예조판서가 되어 윤원형(尹元衡)과 함께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대윤(大尹)의 제거에 가담하고 위사(衛社)공신에 책록되고 중추부지사로 영평군(鈴平君)에 봉해졌다.
1551년(명종 6) 우의정, 1558년 좌의정이 되고 1563년 영평부원군에 진봉되어 궤장(杖)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선조 초에 을사 원흉으로 규탄받아 모든 훈작(勳爵)이 삭탈되었다.
계보 : 16-熺.  17-龜蒙.  18-李孫.  19-漑.
 
윤  경(尹  絅)  (1567~1664)  판도공파.
조선시대 문신. 본관 파평(坡平). 자 미중(美仲). 호 기천(岐川). 시호 정희(靖僖).
1596년(선조 29) 별시문과에 급제, 내외직을 역임하면서 치적을 올렸다. 죽주(竹州)부사를 지낼 때, 임기가 끝났으나 민원에 의하여 1년을 더 유임하였다. 그 뒤 분승지(分承旨). 분병조참의로 있을 때, 이이첨(李爾瞻)의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여 파직되었다.
1621년 접반사로 기용되어 명나라 유격장(遊擊將) 모문룡(毛文龍)을 맞으러 가도(島)에 갔다.
인조가 즉위하자 해주(海州)목사가 되었고, 이괄(李适)의 난 평정에 진력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세자를 완산(完山)으로 호종하고 뒤에 장례원(掌隷院)판결사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종,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그 공로로 병조참의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고 다시 도총관(都摠管)이 되었으며, 이천(利川)부사로 있다가 사임하고 해서(海西)로 내려갔다. 
1645년 공조참판에 오르고 이듬해 자헌대부(資憲大夫)에 특진, 중추부지사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1656년 숭정대부(崇政大夫)로 공조판서를 거쳐, 1660년(현종 1) 돈령부판사에 이르렀다.
계보 : 18-珷.  19-敦仁.  20-大老.  21-絅.
 

윤경립(尹敬立)  (1561~1611)  판도공파.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존중(存中). 호 우천(牛川).
인조 초년의 동궁빈 간택 때 국왕이 대상 집안으로 고집하여 서인, 남인 간에 논란을 빚은 의립(毅立)의 형이며, 이괄(李适)의 난에 가담했던 인발(仁發)의 아버지이다.
1585년(선조 18)에 진사가 되고 1588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으나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름없는 인물이 과분한 천거를 받았다 하여 축출되었다.
그 후 검열 등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여러 직함을 띠면서 군량을 모으고 운반하는 일을 하였다.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훈련대장 조경(趙儆)을 따라 출동한 적도 있다.
1594년 이후 부수찬, 이조좌랑, 시강원사서, 사예, 응교, 교리, 집의, 사간, 동부승지를 지냈다.
1598년 양호찰리사(兩湖察理使)로서 군량을 모은 후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청주, 광주, 황주의 목사를 지냈다.
계보 : 19-廷霖.  20-希廉.  21-國馨.  22-敬立.
 
윤계겸(尹繼謙)  (1442~1483)  판도공파.
조선시대 문신. 자 익지(益之). 시호 공양(恭襄).
1457년(세조 3) 음보로 세자우참군(世子右參軍)이 되고 호조정랑을 거쳐 1467년 의빈부(儀賓府) 경력(經歷)으로 선전관을 겸임하고 동부승지에 올랐다.
1468년(예종 즉위) 남이(南怡), 강순(康純) 등의 옥사 처결에 참여하여 익대(翊戴)공신으로 영평군(鈴平君)에 봉해졌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좌승지가 되고 이듬해 호조참판에 승진,
1471년 좌리공신에 책록되고 공조참판으로 경기도관찰사를 겸임하였다. 그 뒤 대사헌·형조판서를 거쳐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481년(성종 12) 공조판서가 되었다.
계보 : 14-承禮.  15-번.  16-士昕.  17-繼謙.  (* 번-번여 옥 번).
 
윤동규(尹東奎)  (1695~1773)  판도공파.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 파평(坡平). 자 유장(幼章), 소남(邵南).
이익(李瀷)의 문인으로 과거를 보려던 뜻을 버리고 독서와 진리탐구에 몰두하였으며 실학(實學)에서는 모두 그를 존중하였다.
일찍이 국민이 국사(國史)에 어두운 것을 개탄하고 자수(자水), 열수(洌水), 패수(浿水), 대수(帶水)의 《사수변(四水辨》을 저술하였고, 또한 상위(象緯), 역법(曆法), 지리, 강역(疆域), 의방(醫方)에 이르기까지 통하였다.
계보 : 25-鳴謙.  26-聖壽.  27-就望.  28-東奎.
 
윤백원(尹百源)  (1528~1589)  판도공파.
조선 중기의 문신. 자 거용(巨容). 아버지는 명종의 모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오빠인 첨지 원로(元老)이며, 명종대의 권신 원형(元衡)이 숙부이다.
 중종의 맏딸인 효혜공주(孝惠公主)의 딸 김씨에게 장가들었다.
1562년(명종 17) 문과에 급제한 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필선(弼善)을 거쳐 1년 후에 사간이 되었다.
훈구파(勳舊派) 상호간의 권력투쟁에서 아버지를 죽게 한 숙부 윤원형에 대항하여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 이량(李樑)의 세력에 가담함으로써 빠른 승진을 이루었으나, 1563년 이량이 몰락할 때 회령으로 유배되었다.
1565년 문정왕후의 유언에 따라 가까운 곳으로 옮겨지고 77년(선조 10)에 풀려났다.
후에 가족들 간에 불화가 깊어져 아들과 원수처럼 되었고 딸 개미치(介未致)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한다.
계보 : 18-頊.  19-之任.  20-元老.  21-百源.
 

윤봉길(尹奉吉)  (1908~1932.12.19)  판도공파.
 독립운동가. 호 매헌(梅軒). 본명 우의(禹儀). 충남 예산(禮山) 출생. 1918년 덕산(德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3·1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의 비운을 느끼고 자퇴, 성주록(成周錄)이 개설한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928년 부흥원(復興院), 1929년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는 등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이같은 활동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자, 1930년 2월 만주로 망명, 다시 상하이로 갔다. 1931년 상하이에서 세탁소 회계원·모직공장 직공 등으로 전전하며, 김구(金九)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1932년 김구로부터 지시를 받고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및 상하이사변 전승기념식이 열리는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시라카와[白川義則]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貞次] 등을 즉사시키고, 일본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주중(駐中)일본공사 시게마쓰[重光葵]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5월 25일 상하이파견군 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오사카[大阪]로 이송, 12월 18일 가나자와[金澤] 형무소로 옮겨져 19일 총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계보 : 미확인.
 
윤선각(尹先覺)  (1543~1611)  판도공파.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수천(粹天), 소자(小字). 국형(國馨). 호 은성(恩省), 달천(達川).
1568년(선조 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좌승지 등을 지냈다.
1592년 충청도관찰사가 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패전하여 삭직되었다.
뒤에 재기용되어 충청도순변사, 판결사, 중추부동지사 등을 거쳐, 비변사 당상(堂上)이 되어 임진왜란 뒤의 혼란한 업무를 수습하였다.
광해군 초 공조판서를 지냈다.
계보 : 18-之崇.  19-廷霖.  20-希廉.  21-先覺(派譜에는 國馨)
 

윤세호(尹世豪)  (1470~ ?)  판도공파.
 조선 전기의 문신. 자 사영(士英). 시호 공간(恭簡).
 503년(연산군 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검열(檢閱)이 되었다.
승지,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518년(중종 13) 진향사(進香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20년 전라도관찰사 때 죄인 김식(金湜) 사건에 연루, 조광조(趙光祖) 일파로 몰려 파직되었다.
1531년 심정(沈貞), 이항(李沆) 등이 제거되자 다시 기용되어, 1532년 중추부첨지사를 역임하였다.
1539년 공조판서 때 사은사(謝恩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계보 : 16-太山.  17-岑.  18-之峻.  19-世豪.
 
윤  숙(尹  塾)  (1734~1797)  판도공파.
조선 후기의 문신. 자 여수(汝受). 시호 충숙(忠肅).
1761년(영조 3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검열(檢閱)이 되었다.
1762년 사관으로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처형을 극력 반대하고, 이를 방관한 영의정 신만(申晩), 좌의정 홍봉한(洪鳳漢) 등을 성토하다가 강진에 유배되었다.
1776년 정조의 즉위로 재기용되어, 부교리(副校理), 병조좌랑 등을 지냈다.
1783년(정조 7) 대사간을 거쳐, 황해도병마절도사, 중추부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계보 : 24-集成.  25-植.  26-命勳.  27-塾.
 
윤  심(尹  深)  (1633~1692)  판도공파.
조선 후기의 문신. 자 현통(玄通). 호 징암(懲庵).
1660년(현종 1)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와 이조의 청요직을 두루 거치고 경기도관찰사, 강화유수, 개성유수를 지냈다. 제주시재어사(濟州試才御史)로 나갔을 때는 문무인(文武人)의 시험을 주관함은 물론 그 곳 방비의 방안을 제시하고 누대(樓臺)가 있는 배를 건조하자고 건의하였다.
1677년에는 과거 시험관으로서 문제를 잘못 냈다는 이유로 한때 연안에 유배된 바 있다.
정치적으로는 젊었을 때 척신(戚臣) 김석주(金錫胄)를 따랐으며, 도승지 등 관직 승진에 오시수(吳始壽)의 도움을 받았다. 숙종 초년에는 남인의 입장에서 허적(許積), 권대운(權大運) 등과 함께, 송시열이 현종대에 왕실 예제(禮制)를 그르친 죄를 다스리자고 주장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 때 파직되었다가 1689년 기사환국으로 재기하였다.
1689년 이후 공조판서, 병조판서, 돈령부지사에 이르렀다.
예서(隸書)에 뛰어나 많은 비문을 썼다.
계보 : 21-覃茂.  22-知敬.  23-鏶.  24-深.
 
윤여필(尹汝弼)  (1466~1555)  판도공파.
 조선 중종의 장인. 시호 정헌(靖憲).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507년 딸이 중종의 계비(繼妃:章敬王后)가 되자,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에 책봉되고 돈령부판사에 올랐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때 80세 노령이라 화를 모면, 용인현(龍仁縣)에 부처(付處)되었다.
1551년 풀려났으며, 죽은 뒤 복관되었다.
계보 : 15-坤.  16-三山.  17-塘.  18-汝弼.
 

윤영손(尹鈴孫)  ( ? ~1456)  판도공파.
 조선 전기의 문신. 단종의 이모부.
1456년(세조 2)형조정랑(刑曹正郞)으로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과 단종의 복위를 모의, 창덕궁에서 열리는 명나라 사신의 초대연에서 거사, 신숙주(申叔舟)의 살해를 맡았으나 탄로되어 성삼문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정조 때 신원(伸寃)되었다.
계보 : 17-暉.  18-愼德.  19-滂.  20-鈴孫.
 
윤원로(尹元老)  ( ? ~1547)  판도공파.
조선 전기의 문신.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오빠.
왕실의 외척으로서 권세를 잡고, 1537년 권신 김안로(金安老)와, 1544년 대윤(大尹)의 영수 윤임(尹任)과 다투다가 파직되고 유배되었다.
1545년 다시 윤임의 세력을 몰아내고자, 경원대군(慶原大君:明宗)을 해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가 해남(海南)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을사사화 때 풀려나와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에 기용되었다.
1546년 동생 원형(元衡)과 대결하다 탄핵을 받아 파직 유배되고 사사(賜死)되었다.
계보 : 17-繼謙.  18-頊.  19-之任.  20-元老.
 

윤원형(尹元衡)  ( ? ~1565)  판도공파.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언평(彦平). 소윤(小尹)의 영수.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
1533년(중종 28)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관(史官)에 등용된 뒤 여러 벼슬을 거치는 동안 세력을 잡아 세자(世子:仁宗)를 폐위하고, 경원대군(慶原大君:明宗) 환(환)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모의로 세자의 외숙인 대윤(大尹)의 영수 윤임(尹任)과 다투다 1544년 인종이 즉위하자 파직당하였으나 다음해 명종이 즉위, 이어 문정왕후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이 시작되면서 득세, 대윤의 윤임,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등을 사사(賜死)하게 하였다.
을사사화의 공으로 보익공신(保翼功臣) 3등, 이어 위사공신(衛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서원군(瑞原君)에 봉해졌다. 1546년(명종 1), 형 원로(元老)와 권세(權勢)를 다투어 유배하게 하고, 이듬해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을 계기로 대윤의 잔당을 모두 숙청하였다.
1548년 이조판서, 1551년 우의정, 1558년 다시 우의정을 거쳐서, 1560년(명종 15) 서원부원군(瑞原府院君)에 봉해지고, 1563년 영의정에 올랐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삭직되고 강음(江陰)에 귀양가서 죽었다.
계보 : 17-繼謙.  18-頊.  19-之任.  20-元衡.
 
윤의립(尹毅立)  (1568~1643)  판도공파.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지중(止中), 호 월담(月潭). 초명 의립(義立).
1594년(선조 27) 별시문과에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정자(正字)를 지낼 때 조카가 이괄(李适)의 난(1624)에 가담하여 처형된 뒤 벼슬을 사직하였다. 그 뒤 다시 관계에 진출, 1626년 경주부윤(慶州府尹), 이어 충청, 경기도 관찰사, 형조,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의정부 좌참찬에 이르렀다.
그림과 글씨에 능하였고, 산수화로 이름을 떨쳤다. 저서로 「야언통재(野言通載)」「산가청사(山家淸事)」가 있고, 그림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산수도」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산수도」(묵화)가 있다.
계보 : 19-廷霖.  20-希廉.  21-國馨.  22-毅立(義立).
 
 
윤  임(尹  任)  (1487~1545)  판도공파.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임지(任之). 시호 충의(忠義). 중종비(妃)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오빠.
 대윤(大尹)의 거두. 무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경주부윤에 올랐다. 1523년(종종 18)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왜선과 싸우다 패하여 충군(充軍)되었다. 인종(仁宗:장경왕후 소생)이 세자로 있을 때,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가 경원대군(慶源大君:명종)을 낳자, 김안로(金安老)와 함께 세자 보호를 둘러싸고 문정왕후와 알력이 생겼다.
1537년 김안로가 실각하고 윤원형(尹元衡)이 집권하면서 세력다툼이 심하여졌다.
1543년부터 그를 대윤(大尹), 윤원형을 소윤(小尹)이라 불렀다.
1545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垂簾廳政)을 기화로, 소윤은 을사사화를 일으켜 정적(政敵)인 대윤 일파를 숙청하였다.
이때 아들 3형제와 함께 사사(賜死)되었으며, 1577년(선조 10) 신원되었다.
계보 : 16-士윤(햇빛 윤).  17-甫.  18-汝弼.  19-任.
 
윤정립(尹貞立)  (1571~1627)  판도공파.
조선 중기의 선비화가. 자 강중(剛中). 호 학산(鶴山)·매헌(梅軒). 의립(毅立)의 동생.
벼슬은 의금부도사를 거쳐 군수를 지냈다. 그림은 중년 이후부터 그리기 시작한 듯하며 현존하는 작품을 보면 거의가 인물 중심으로 구성된 산수인물화로서 필법과 묵법 등이 조선 중기에 성행했던 절파화풍(浙派畵風)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특히 인물들의 모습 등은 16세기 후반의 화가 윤인걸(尹仁傑)이나 이경윤(李慶胤)의 절파화풍과 상통되는 점이 많아 형 의립의 화풍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유작으로는 《관폭도(觀瀑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행선도(行船圖)》(개인 소장) 등이 전한다.
계보 : 19-廷霖.  20-希廉.  21-國馨.  22-敬立.
 

윤정준(尹廷俊)  ( ? ~1624)  판도공파.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파평(坡平). 자 수백(秀伯). 시호 충민(忠愍). 중추부동지사 윤경(尹瓊)의 아들.
1608년(선조 41) 무과에 급제하여 무반의 요직인 선전관(宣傳官)에 올랐다.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에서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여 군사를 보내줄 것을 요구하자 정부에서는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파견하였는데, 이때 김응하(金應河) 등과 함께 강홍립의 휘하에 들어가 종군하였다. 1624년 옹진현감으로 있으면서 반란군인 이괄(李适)의 군사를 방어하던 중 포로로 잡혔으며, 이후 이괄이 회유하자 도리어 이괄이 신하의 도리를 못하고 반역한 죄를 꾸짖다가 처형되었다. 사후에 병조참판이 추증되고 파령군(坡寧君)에 봉해졌다. 금천(金川)의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되었으며, 조익(趙瀷)이 비문(碑文)을 썼다.
계보 : 19-任.  20-興仁.  21-瓊.  22-廷俊.
 
윤제홍(尹濟弘)  (1764~ ? )  판도공파.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 자 경도(景道). 호 학산(鶴山), 찬하(餐霞). 경기 양주 출생.
벼슬은 사관(史官)을 거쳐 1801년 정언이 되었으나 1806년 김구주(金龜柱)의 관직이 추탈될 때 그 일파로 몰려 창원(昌原)에 유배되었고, 1830년 풍천부사(豊川府使)로 있을 때 암행어사 홍희석(洪羲錫)의 탄핵으로 삭직당했다가 풀려나 1840년 대사간에 이르렀다.
그의 작품을 보면 제기(題記) 가운데 스스로 정선(鄭선), 심사정(沈師正), 이인상(李麟祥) 등의 화풍과 비교한 것이 있으며, 때로는 그들을 모방해 그린 그림도 있다.
특히 〈고사도(高士圖)〉〈모루관폭도(茅樓觀瀑圖)〉 등에서는 이인상의 화풍을 많이 따른 흔적을 엿볼 수 있으며, 화제에도 그렇게 적고 있다. 지두화(指頭畵)에도 능하여 여러 폭의 지두화첩을 남겼다.
유작으로는 앞서 든 작품 외에도 〈산수인물도〉〈은사보월도(隱士步月圖)〉〈송하소향도(松下燒香圖)〉 등이 전한다.
계보 : 22-지.  23-得壽.  24-錫復.  25-濟弘  (*지-주춧돌 지)
 
 
윤종의(尹宗儀)  (1805~1886)  판도공파.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자 사연(士淵). 호 연재(淵齋). 시호 효정(孝貞).
생원시를 거쳐, 1852년(천종 3) 개성부도사, 김포현령, 함평군수, 청풍부사 등을 지냈다.
파광군(坡光君)에 봉하여지고, 공조판서에 올랐다.
제자백가에 정통하고, 병법·농사·천문·예학(禮學) 등에 밝았다. 저서로 〈예기사문록(禮記思問錄)〉〈사서의의(四書疑義)〉〈상례분류(喪禮分類)〉〈유사소의연재집(游史小義淵齋集)〉등이 있다.
계보 : 29-景和.  30-五榮.  31-埴.  32-宗儀.
 
윤지경(尹知敬)  (1584~1634)  판도공파.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유일(幼一). 호 창주(滄洲). 도승지 담무(覃戊)의 아들.
1603년(선조 36)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60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7년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이후 수찬(修撰), 필선(弼善), 사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대에 청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폐모론(廢母論)에는 반대하여 1623년의 인조반정 이후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인조대에 응교(應敎), 집의(執義), 사간, 동부승지 등을 지냈으며, 후금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척화론(斥和論)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후금이 화친을 논의할 때 생원 윤형지(尹衡志)가 상소를 올려 화친의 주창자들을 공격하자 윤황(尹煌)과 함께 이를 적극 지지하여, 공론(公論)에서는 이들을 지목하여 ‘삼윤(三尹)의 정기(正氣)’라고 평하였다. 조경(趙絅)이 비명(碑銘)을 썼다.
계보 : 19-慨.  20-비(도지개 비).  21-覃茂.  22-知敬.
 

윤춘년(尹春年)  (1514~1567)  판도공파.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자 언구(彦久). 호 학음(學音). 참판 윤안인(尹安仁)의 아들,
1534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43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중종 사후에 소윤(小尹)과 대윤(大尹)의 분열이 일어나자 소윤의 영수인 윤원형(尹元衡)의 세력에 가담하여 명종이 즉위한 후에 많은 선비들을 숙청하면서 윤원형 독주체제의 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명종 즉위 후 정언(正言)을 거쳐 이조좌랑, 수찬(修撰), 지평(持平), 장령(掌令) 등의 청요직을 두루 지냈으며, 1553년 대사간, 이듬해에 대사헌에 올랐다.
1558년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이후 한성부판윤, 이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다가, 1565년 윤원형이 실각하자 파직되었다. 윤원형의 주도로 서얼허통(庶孼許通)을 논의할 때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사간원과 홍문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찬성하였다. 그는 스스로 학문을 자부하였으나, 학문경향은 불교와 도교적인 요소도 포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종실록》의 졸기(卒記)에는 “요탄(妖誕)한 것을 말하는 것을 좋아하여 세속에서 전하기를 김시습(金時習)을 추존하여 공자에까지 비교했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그가 당시의 주류이던 주자성리학의 학문에만 집착하지 않았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김홍도(金弘度:1524~57)·김계휘(金繼輝)·박민헌(朴民獻) 등이 그의 문하에 드나들었다. 저서에 《학음고(學音稿)》가 있다.
계보 : 16-士昕.  17-琳.  18-安仁.  19-春年.
 
윤필병(尹弼秉)  (1730~1810)  판도공파.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자 이중(彛中). 호 무호당(無號堂)·무호암(無號庵). 윤사용(尹師容)의 아들.
1765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767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간, 장령(掌令) 등 청요직을 거쳐 1786년 중추부첨지사에 올랐다.
1797년 정조의 총애를 받던 채제공(蔡濟恭)을 서학(西學)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탄핵했다가 도리어 파직당했다.
1799년 대사간을 거쳐 강원도관찰사가 되고, 1806년 중추부동지사를 지냈다. 글씨를 잘 썼으며, 경사자집(經史子集)의 학문에 능통하 였다.
계보 : 24-以濟.  25-基慶.  26-師容.  27-弼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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