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페이지하단 바로가기

坡平尹氏 昭靖公派蔚山 蘇亭門會

문서자료실

  • 문중소개
  • 문서자료실

파평윤씨 남원파 인물사

페이지 정보

작성자 선주 댓글 0 조회 4,348 작성일 06-01-20 14:18

본문

본 문중 인물사의 빈약한 자료를 안타까워 했으나 자료를 구하기 힘들어 애쓰던중 다행이  대종회 원로분의 도움으로 남원파 인물사를  자료실에 올리게 된 것을 감사히 생각하며 그분의 조상님을 기리는 뜻을 세겨 잘 활용 하였으면 고맙 겠습니다

남원파만을  ㄱ,ㄴ,ㄷ 순으로 정리했습니다
 
윤  결(尹  潔)  (1517~1548)  남원파.
조선시대 문신. 자 장원(長源). 호 취부(醉夫).
1537년(중종 32) 진사가 되고, 154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명종 초에 주서(注書)로서, 류쿠[琉球]에 표류한 박손(朴孫)의 경험담을 토대로 「유구풍속기」를 지었다.
1548년 수찬(修撰)에 이르렀다. 「시정기(時政記)」필화사건으로 참형된 안명세(安明世)를 위해 변명하다가 사형되었다. 67년 선조가 즉위하자, 복관되었다. 성격이 고결하였고, 시에 뛰어났다.
계보 : 미상.
 

윤  계(尹  棨)  (1583~1636)  남원파.
조선시대 문신. 자 신백(信伯). 호 신곡(薪谷). 시호 충간(忠簡).
1624년(인조 2) 사마시에 합격, 1627년 정묘호란 때 상소하여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배속되었다.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서 전적(典籍)으로 승진, 이어 교리가 되고 남양(南陽)부사에 이르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던 중 청군에게 잡혀 참살되었다.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계보 : 미상.
 
윤기헌(尹耆獻)  ( ?  ~  ? )  남원파.
조선 중기의 학자. 자 원옹(元翁). 호 장빈자(長貧者). 이이(李珥)의 문인.
선조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00년(선조 33) 죽산현감(竹山縣監), 뒤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지내고 용성군(龍城君)에 봉해졌다. 성리학(性理學)에 밝고 문명(文名)이 높았다. 저서에 「장빈호찬(長貧胡撰)」이 있다.
 

윤  돈(尹  暾)  (1551~1612)  남원파.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여승(汝昇). 호 죽창(竹窓). 시호 효정(孝貞).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의 문인이다.
1579년(선조 12)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85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삼사와 육조 등의 관직을 두루 거치고 도승지, 충청, 강원 관찰사, 중추부동지사를 지낸 후 광해군대에 예조판서에 올랐다.
1591년 이조정랑으로서, 정철(鄭澈)이 세자를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가 유배된 사건에 연루된 백유함(白惟咸), 유공신(柳拱辰)을 학관(學官)에 추천하였다가 국왕의 분노를 사서 삭직된 바 있으며, 부제학으로 있던 1600년에는 임진왜란 때 국왕을 호종하지 않은 죄로 성혼(成渾)을 탄핵하여 관작(官爵)을 빼앗게 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임금을 호종하고 명(明)나라 장수를 접대하는 접반관(接伴官)일을 맡았다.
1608년에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로서 조성한 선조의 능(陵)이 비에 무너지자 예조판서에서 파직되었다.
계보 : 미상.
 

윤  섬(尹  暹)  (1561~1592)  남원파.
조선 전기 문신. 자 여진(如進). 호 과재(果齋). 시호 문열(文烈).
1583년(선조 16)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檢閱), 지평(持平) 등을 지냈다.
1587년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태조의 조상이 이인임(李仁任)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바로잡았다. 그 공로로 1590년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책록,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에 책봉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교리(校理)로서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의 종사관이 되어, 상주성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계보 : 미상.
 

윤이명(尹以明)  (1629~1682)  남원파.
조선 중기의 문인(文人). 자 문숙(文淑). 호 취선(醉仙).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아버지와 형을 모두 잃어 고아가 되었다.
효종 때 왕의 특지로 참봉(參奉)에 올라 60년(현종 1) 군위현감(軍威縣監)에 이르렀다. 문장에 능했고 전서(篆書), 예서(隸書)에 일가를 이루었다. 이조참의가 추증되었으며 편저서에 「삼절유고(三節遺稿)」가 있다.
 
 
윤자신(尹自新)  (1529~1601)  남원파.
조선 중기의 문신. 자 경수(敬修). 광해군의 장인.
1562년(명종 17) 별시문과에 급제, 성균관에 보임되었다. 그 뒤 회양부사, 태인현감, 호조정랑 등을 거쳐, 1585년(선조 18) 호조참판을 지냈다.
1586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89년 기축옥사 때 전주부윤이 되어 역적 정즙(鄭緝)을 잡았고, 그 공으로 가자(加資)되었다.
1592년 우승지(右承旨)로서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였다. 피난 때 종묘서제조(宗廟署提調)로서, 종묘의 신주(神主)를 송도(松都)에 임시로 매혼(埋魂)하였다.
1597년 한성부판윤, 이듬해 호조판서를 거쳐, 1600년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가 죽자 빈전도감(殯殿都監), 인산도감(因山都監) 제조가 되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에 추봉되었다.
계보 : 미상.
 
윤정현(尹定鉉)  (1793~1874)  남원파.
조선 후기 문신. 자 정수(鼎). 호 심계.
1843년(헌종 9) 식년문과에 급제, 규장각직각을 지냈다.
대사성, 이조참의가 되고, 1848년 황해도관찰사, 이듬해 병조판서가 되었다. 1850년(철종 1) 실록지사(實錄知事)로 교정당상(校正堂上)이 되어 「헌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1856년 규장각제학으로 주자소주관당상(鑄字所主管堂上)이 되어 규장각의 활자를 주자(鑄字)하고, 그 공으로 가자(加資)되었다. 경사(經史)에 밝았고 비지(碑誌)에 조예가 깊었으며, 글씨를 잘 썼다. 문집에 「심계집」이 있다.
계보 : 미상.
 
윤  집(尹  集)  (1606~1637)  남원파.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성백(成伯). 호 임계(林溪)·고산(高山). 시호 충정(忠貞).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
22세에 생원이 되고, 1631년(인조 9) 별시문과에 급제, 1636년(인조 14) 이조정랑(吏曹正郞), 교리(校理)가 되었다.
병자호란 때 화의를 적극 반대, 척화론자로 오달제(吳達濟), 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청나라에 잡혀가서 갖은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선양[瀋陽] 서문(西門) 밖에서 사형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계보 : 미상.
 
윤행임(尹行恁)  (1762~1801)  남원파.

조선 후기의 문신. 자 성보(聖甫). 호 방시한재(方是閑齋)·석재(碩齋). 시호 문헌(文獻).
1782년(정조 6)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에 등용,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었다.
 1788년 민치화(閔致和)와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성환역(成歡驛)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규장각직각에 복직되고, 1792년 이조참의, 다음해 비변사제조 등을 지내는 동안 시파로 왕의 신임이 두터웠다. 1800년 정조가 죽자 왕의 시장(諡狀)을 썼으며, 순조가 즉위한 뒤 이조판서에 올랐다.
1801년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고, 수렴청정한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시파를 추방하기 위해 신유박해를 일으키자,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되었다. 곧 풀려나와 전라도관찰사에 기용되었으며, 척신 김조순(金祖淳)의 상소로 투옥, 참형되었다.
글씨에 뛰어났고, 헌종 초에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윤형각(尹衡覺)  (1601~1664)  남원파.
 조선 중기의 문신. 자 경선(景先).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으로 6품직을 제수받고 인제현감으로 나갔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사평(司評)으로서 원두표(元斗杓)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남한산성을 방어하였다.
1646년 유탁(柳濯) 등이 열읍(列邑)의 흉도들을 모아 반역을 꾀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보고하여 이들을 복주(伏誅)하는 데 공을 세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파주목사를 제수받았다. 이후에 성주목사 등을 지냈다.
계보 : 미상.
 
윤형성(尹衡聖)  (1608~1676)  남원파.
조선 중기의 문신. 자 경임(景任). 호 기기재(棄棄齋).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664년 정언(正言)이 되었다. 그 뒤 전적(典籍), 병조정랑, 장령 등을 거쳐, 1672년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이 되었다. 이어 보덕(輔德), 예빈시정(禮賓寺正), 삼척부사 등을 역임, 옥천군수에 이르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사간, 집의(執義) 등을 거쳐, 진주목사를 지냈다.
저서에 「조야첨재(朝野僉載)」가 있다.
 

윤효손(尹孝孫)  (1431~1503)  남원파.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남원(南原). 자 유경(有慶). 호 추계(秋溪). 시호 문효(文孝).
1450년(세종 32) 생원, 1453년(단종 1)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 저작(著作), 박사, 1457년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 우헌납(右獻納)에 특임되었다.
1470년(성종 1)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로서 「경국대전」「오례의주(五禮儀註)」를 수찬, 호조참의를 지냈다. 1475년 전주부윤으로 치적을 올려 금단의(錦段衣)를 하사받고, 경상도관찰사, 한성부우윤, 대사헌을 지냈다.
 1489년 명나라에 갔다 오는 길에 「활민대략(活民大略)」「속자치통감강목(續資治通鑑綱目)」등을 구입, 왕에게 진상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였다.
 1493년 경상도 양전순찰사(量田巡察使), 형조판서를 거쳐 우참찬으로서 성균관동지사, 춘추관지사 등을 겸직, 「성종실록(成宗實錄)」편찬에 참여, 좌우참찬에 이르렀다.
 
윤효전(尹孝全)  (1563~1619)  남원파.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영초(永初). 호 기천(沂川). 윤휴(尹)의 아버지로 민순(閔純)의 문하생이다.
1605년(선조 38)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왕자사부(王子師傅)를 거쳐, 충청도관찰사, 도총관(都摠官) 등을 역임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참여한 공으로 익사공신(翼社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이후 대사헌, 의금부지사, 경주부윤 등을 역임하였다.
1617년 경주부윤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아들 윤휴(尹휴)를 낳았다. 서경덕의 제자인 민순(閔純)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정구(鄭逑)의 「문인록(門人錄)」에도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정구의 학문적 영향력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서경덕을 존숭하여 서경덕(徐敬德)의 문집인 「화담집(花潭集)」의 간행에 참여했으며, “서경덕의 저술 1권은 다른 학자의 10권의 책에 비길 만하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의 당색(黨色)은 북인임에는 틀림없으나, 「숙종실록」에서는 대북(大北)으로는 윤휴의 문집인 「백호전서(白湖全書)」에는 소북(小北)으로 파악하여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지는 않다. 이것은 그가 광해군 초기에는 유희분(柳希奮)의 사주를 받아 임해군의 처단을 주장하는 등 소북의 정치노선을 따랐으나, 1618년(광해군 10)경 이후로는 이이첨(李爾瞻)의 대북 세력에 가담하였기 때문이다.
 

윤  휴(尹  휴)  (1617~1680)  남원파.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자 희중(希仲). 호 백호(白湖), 하헌(夏軒).
재학(才學)으로 천거되어 1656년(효종 7)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를 거쳐 지평(持平),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우참찬(右參贊), 이조판서,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되자 갑산(甲山)에 유배, 사사(賜死)되었다.
종래의 주자(朱子)의 해석방법을 배격하고 「중용(中庸)」「대학(大學)」「효경(孝經)」등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장구(章句)와 주(註)를 수정, 당시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정계에 등장한 뒤 오가작통사목(五家作統事目), 지패법(紙牌法)을 실시, 세법(稅法)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문란한 군정을 바로잡기 위해 상평창(常平倉),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또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체부(體府)를 신설하여 북벌에 대비하게 하였으나 결과가 나빠 모두 폐지되었다.
1889년(숙종 15) 신원(伸寃),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주요저서에 「독서기(讀書記)」「주례설(周禮說)」「중용대학후설(中庸大學後說)」「중용설(中庸說)」 등이 있고, 문집에 「백호집」이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