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윤씨 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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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주 댓글 0 조회 6,334 작성일 04-10-14 14:17본문
尹氏
본관은 문헌에 149본이 전하지만, 파평(坡平)·해평(海平)·남원(南原)·칠원(漆原)·무송(茂松)·함안(咸安)·해남(海南)·해주(海州)·예천(醴泉)·야성(野城)·기계(杞溪)·양주(楊州)·현풍(玄風)·죽산(竹山)·고창(高敞)·평산(平山)·영천(永川)·여주(驪州)·신녕(新寧)·덕산(德山) 등 20여 본이 현존한다.
그러나 해평·무송·칠원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은 모두가 파평윤씨에서 분적되었다고 하며,
그 중 남원윤씨·함안윤씨·야성윤씨·신녕윤씨 등은 파평윤씨로 환보(還譜)하였다고 한다.
윤씨는 파평윤씨의 분적종을 포함한 파평계가 전체 윤씨 인구 중에서 가장 많고,
해평윤씨가 다음을 차지한다.
윤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592명에 상신 18명, 문형(文衡:大提學) 6명, 왕비(폐비 1명 포함) 6명, 부마 7명, 봉군 7명을 배출하였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 9만 143가구, 51만 6985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8위였고, 85년도 조사에서는 83만 4081명, 전국 인구구성비 2.1 %로 274성 중 역시 제8위였다.
파평윤씨】
시조는 고려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諱신달(諱莘達)이며, 현손 諱관(諱瓘)은 고려 중엽의 문무를 겸비한 명장으로 파평윤씨의 중시조이다. 아들 7형제를 두었으며 아랫대로 내려가면서 수십 파로 분파되었다.
파평윤씨 가운데서 주로 판도공파(版圖公派:諱承禮)와 소정공과(昭靖公派:諱坤)에서 대대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이 두 파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여 파평윤씨의 약 80 %를 차지한다.
판도공파는 諱승례(諱承禮)의 아들대에서 다시 제학공파(提學公派:諱珪)·부윤공과(府尹公派:諱普老)·정정공파(貞靖公派:)로 갈라지며, 그 중 정정공파가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집안이다. 諱번()은 세조의 국구로서 그의 맏아들 諱사분(諱士昐)은 우의정, 둘째 諱사균(諱士均)은 예조판서, 셋째 諱사흔(諱士昕)이 우의정이 되어 형제간에 정승을 지냈다.
그러나 뒤에 諱사분과 諱사흔 두 집안에서 같은 시기에 각각 왕비가 나와, 왕실을 배경으로 대굅?소윤으로 갈라져 일가상잔의 비극이 일어났다.
諱사분의 증손 諱임(諱任)은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오빠이며, 장경왕후는 諱여필(諱汝弼)의 딸로서 세자를 낳고 산후병으로 죽었다. 장경왕후의 뒤를 이어 諱사흔의 증손인 諱지임(諱之任)의 딸이 제2계비로 책봉되어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되었다. 문정왕후가 아들 경원대군(慶源大君:明宗)을 낳은 뒤로 장경왕후의 오빠 諱임을 중심으로 한 일파,
즉 대윤과 문정왕후의 동생 諱원형(諱元衡)을 중심으로 한 소윤이 정치적 암투를 벌였다.
소정공파는 諱승례의 형 諱승순(諱承順)의 아들 諱곤(諱坤)의 후손이다.
소정공 諱곤은 정종 때 제2차 왕자의 난에 방원(芳遠)을 도와 좌명공신에 책록, 이조판서를 지냈다. 손자 諱호(諱濠)는 성종의 국구로서 딸이 성종비 정현왕후(貞顯王后)가 되면서 돈령부영사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성종 때 영의정을 지낸 諱필상(諱弼商)의 증손 諱현(諱鉉)은 명종 때 호조판서를 지내고, 선조 때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돈령부영사에 이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이 밖에 諱사로(諱師路)는 세종의 딸 정현옹주(貞顯翁主)와 결혼하여 영천군(鈴川君)에 봉해지고, 세조 즉위년 좌익공신에 책록되고 좌찬성·중추부영사에 이르렀다. 이조판서 諱강(諱絳)과 다섯 아들 諱지미(諱趾美)·諱지선(諱趾善)·諱지완(諱趾完)·諱지경(諱趾慶)·諱지인(諱趾仁) 등이 뛰어났으며, 특히 諱지선·諱지완의 형제 정승이 유명하다.
諱지선은 현종 때 병조·이조·공조판서를 거쳐, 숙종 때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諱지완은 어영대장·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우의정에 오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한편 숙종 때 호조참판을 지낸 諱비경(諱飛卿)의 손자 諱봉구(諱鳳九)·諱봉오(諱鳳五)·諱봉조(諱鳳朝), 그리고 증손 諱심형(諱心衡) 등이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이다.
諱봉구는 강문8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숙종 때 집의(執義)·찬선(贊善) 등을 지내고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그의 아우 諱봉오는 영조 때 대사헌·우참찬 등을 지냈으며, 諱봉조는 암행어사·대사간 등을 지내고, 영조 때 부제학이 되고 대제학에 이르렀다. 또 諱심형은 영조 때 부제학·예조참판등을 역임하였다.
노성윤씨(魯城尹氏)란 노성(魯城:論山)에 세거한 파평윤씨 諱돈(諱暾)의 후손을 가리키며, 충남에서는 학자 집안으로 알려졌다.
諱돈은 선조 때 대사헌·공조판서를 지냈으며, 그의 다섯 손자 가운데 특히 諱황(諱煌)은 아우 諱전(n)과 함께 학자로 유명하다.
諱황의 여덟 아들 중 諱순거(諱舜擧)·諱문거(諱文擧)·諱선거(諱宣擧) 세 아들이 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諱문거는 효종 때 동래부사를 지내고 경학(經學)·성리학·서예에 뛰어났고, 선거는 거유로서 숙종 때 예송(禮訟)을 둘러싼 대립에서 중립을 지켰다.
그의 아들 諱증(諱拯)은 숙종 때 대사헌·이조판서·우의정 등에 임명되었으나 한번도 취임하지 않았으며, 왕과 한번의 배면(拜面)도 없이 상신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諱증은 서인이 노·소론으로 분당하자 송시열의 노론에 대항하여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아들 諱행교(諱行敎)도 대사헌이 되었다.
이 밖에도 정승급 인물로는 諱인경(諱仁鏡)·諱동도(諱東度) 등이 있다. 諱인경은 각조의 판서를 거쳐 인종 때 좌의정·영의정이 되고,
명종이 즉위하자 위사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諱동도는 영조 때 대사간·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학자로는 諱정(諱鼎)·諱경남(諱景男)·諱낙(諱洛) 등이 유명하다. 근세인물로는 1932년 상하이에서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등을 폭사시킨 의사 諱봉길(諱奉吉)이 있다.
【해평윤씨】
시조는 고려시대 고종·원종을 섬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사공(守司空) 좌복야(左僕射) 공부판사(工部判事) 諱군정(諱君正)이다.
諱군정의 증손대에서 문영공파(文英公派:諱之賢)와 충간공파(忠簡公派:諱之彪)의 양파로 갈라진다. 해평윤씨가 배출한 조선의 상신 6명, 문형 3명 중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諱은보(諱殷輔)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諱승훈(諱承勳)만이 문영공파에 속하고,
나머지는 모두 충간공파에서 나왔다.
충간공파에서도 선조 때 영의정 諱두수(諱斗壽)의 후손인 오음공파(梧陰公派)와, 그의 아우로 선조 때 대제학을 지낸 諱근수(諱根壽)의 후손인 월정공파(月汀公派)의 양파가 번창하여, 후손이 해평윤씨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諱두수의 다섯 아들 諱방(諱昉)·諱흔(諱昕)·諱휘(諱暉)·諱훤(諱暄)·諱오(諱旿) 등이 모두 등제 현달하였다.
그 중에서도諱방이 인조 때 영의정을 지냄으로써 부자 영상으로 이름을 떨쳤다.
諱방은 도승지·한성판윤·형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에 반대하여 은퇴하였으며, 인조반정으로 예조판서에 등용,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지냈다.
諱흔은 우승지를 지내고 계축옥사로 파직되었다가, 역시 인조반정 뒤 예조참판·중추부지사 등을 지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諱휘는 인조를 호종, 적진을 왕래하면서 화의를 교섭하였고, 뒤에 형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에 이르고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諱훤은 병조판서, 諱오는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오음공파에서 뛰어난 인물을 살펴보면,
치천공파(稚川公派)인 諱방의 아들 諱이지(諱履之)가 돈령부판사, 諱신지(諱新之)가 선조의 부마로 시·서·화에 능하였다.
諱신지의 아들 諱지()가 이조참판,
諱지의 5세손 諱명렬(諱命烈)도 이조참판,
諱명렬의 아들 諱치희(諱致羲)가 이조판서,
諱치희의 아들 諱용선(諱容善)이 한말 총리대신인 의정(諱議政)을 지냈다.
諱치희의 조카 諱의선(諱宜善)은 순조의 부마,
諱이지의 6세손 諱홍렬(諱弘烈)이 판서를 지냈다.
장주공파(長洲公派)인 諱휘(諱暉)의 손자 諱계()와 諱계의 아들 諱세기(諱世紀)가 다같이 병조판서를 지냈다.
諱세기의 5세손 諱치용(諱致容)은 공조판서,
그의 아우 諱치정(諱致定)은 이조판서,
휘치용의 아들 諱우선(諱宇善)도 이조판서를 지냈다.
諱계의 손자 諱급(諱汲)도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글씨에 뛰어나 윤상서체(尹尙書體)를 이룩하였다. 諱급의 종손 諱시동은 정조 때 각조의 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백사공파(白沙公派)인 諱훤의 아들 諱순지(諱順之)는 예조판서·
대제학, 諱훤의 증손 諱유(諱游)는 이조판서,諱 순(諱淳)은 이조판서를 거쳐 대제학을 지냈다.
諱근수는 선조 때 동부승지를 거쳐 대사성에 오르고, 부제학·대사헌·형조판서·양관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한편 문영공파의 인물로는 諱은보가 영의정,
諱은보의 종손 諱승길(諱承吉)이 찬성,
그의 아우 諱승훈(諱承勳)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근세인물로는 윤비(尹妃:純宗妃)가 영의정 諱방의 후손이고,
諱치호(諱致昊)는 諱흔의 8세손이다. 그의 아버지 諱웅렬(諱雄烈)은 한말에 군부대신이었다.
【남원윤씨】
시조는 장군 諱관(尹瓘)의 증손 諱위(諱威)이다.
신종 때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호남안렴사가 되어 남원의 적을 토평하고 남원군에 봉해진 뒤, 자손들이 관적을 남원으로 하였다.
그의 7세손 諱형(諱衡)이 형조·이조판서를 지냈으며,
諱위의 후손 諱섬(諱暹)은 선조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들어가 태조의 조상이 이인임(李仁任)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바로잡아, 그 공으로 광국공신 2등에 책록되고 사복시정을 지냈다.
諱섬의 손자 諱집(諱集)은 척화론자로서 청나라에 잡혀가서 장렬한 죽음을 하여 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과 함께 3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이 밖에도 이조판서·양관대제학을 지낸 諱행임(諱行恁),
예조·이조판서·중추부지사를 역임한 諱정현(諱定鉉),
대사성·이조판서·돈령부판사를 지낸 휘병정(諱秉鼎), 남인의 거물이며 대사헌·이조판서를 역임한 諱전(諱鐫) 등 많은 인물이 나왔다.
【칠원윤씨】
시조는 신라 때 태자태사(太子太師) 諱시영(諱始榮)이며,
그의 후손 諱수(諱秀)는 고려 충렬왕 때 군부판서(軍簿判書)·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을 지냈다.
諱 수의 증손 諱저(諱抵)는 태조의 잠저시부터 시종한 인연으로 상장군이 되고 제2차 왕자의 난 때 태종을 도와 좌명공신 3등에 책록, 찬성사가 되었다.
諱수의 6세손 諱석보(諱碩輔)는 옥당(玉堂)·직제학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그의 아들 諱풍형(諱豊亨)은 관찰사·부제학을 역임하였다.
諱석보의 증손 諱탁연(諱卓然)은 명종 때 춘추관기사관으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옥당·3도관찰사·형조·호조판서를 지냈으며, 선조 때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칠계군(漆溪君)에 봉해졌다.
諱수의 14세손 諱지술(諱志述)은 숙종 때 유생으로 신임사화에서 화를 입었으며, 임창(任敞)·이의연(李義淵)과 함께 3포의(三布衣)로 일컬어졌다.
【무송윤씨】
시조는 고려시대 보승낭장(保勝郞將)으로 호장(戶長)을 지낸諱양비(諱良庇)이다.
그의 증손 諱택(諱澤)은 정당문학·첨의찬성사를 지냈고,
諱택의 손자 諱소종(諱紹宗)은 조선시대 병조전서(兵曹典書)로 《고려사》 편찬에 참여, 회군공신(回軍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諱소종의 아들 諱회(諱淮)는 세종 때 병조판서·대제학을 지냈는데 주호(酒豪)로 유명하였고, 그의 손자 諱자운(諱子雲)은 우의정·영의정을 지냈다.
諱자운의 5세손 諱형(諱泂)은 선조 때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 2등에 책록되고, 호조판서·중추부판사를 역임하였다.
【해남윤씨】
시조는諱존부(存富)이며,
후손 諱구(諱衢)가 중종 때 호당에 뽑히고 사성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諱의중(諱毅中)이 대사헌·대사간·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諱의중의 손자 諱선도(諱善道)는 시조(時調)의 대가로 유명하며, 한성서윤·예조참의·중추부첨지사 등을 역임하였고, 남인의 거두로서 예송(禮訟) 때는 송시열(宋時烈) 등과 대립하였다.
諱선도의 증손 諱두서(諱斗緖)는 숙종 때 화백으로서 심사정(沈師正)·정선(鄭敾)과 함께 3재(三齋)로 일컬어졌다.
함안윤씨의 시조는 문하시중을 지낸 諱돈(諱敦)이다.
후손 諱각(諱慤)은 조선 숙종 때 무과에 급제, 삼군수군통제사를 거쳐 총융사(摠戎使)를 지냈고, 의검(義儉)·諱태연(諱泰淵)은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지냈다.
연산군의 외조부인 諱기무(諱起畝)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 봉상시판사(奉常寺判事)를 지냈으며, 아들 諱구()는 참판을 지냈다.
해주윤씨는 서흥윤씨(瑞興尹氏)라고도 하며, 시조는 세종 때 중추부지사를 지낸 諱중부(諱重富)이다.
아들 諱희평(諱熙平)은 연산군 때 무과에 급제, 공조판서·중추부지사를 지냈다. 영천윤씨의 시조는 고려시대 호장 諱절생(諱切生)이다.
영천윤씨의 인물로는 태종 때 군수 諱순(諱淳), 성종 때의 이조참의 諱긍(諱兢), 선조 때 중추부참지사 諱빙(諱聘) 등이 있다.
예천윤씨의 시조는 추밀원부사를 지내고 증례빈시소윤(贈禮賓寺少尹)인 諱충(諱忠)이다.
증손 諱상(諱祥)은 태조 때 문과에 급제, 대사성·예문관제학·성균관박사를 지냈으며, 성리학과 역학(易學)에 밝아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본관은 문헌에 149본이 전하지만, 파평(坡平)·해평(海平)·남원(南原)·칠원(漆原)·무송(茂松)·함안(咸安)·해남(海南)·해주(海州)·예천(醴泉)·야성(野城)·기계(杞溪)·양주(楊州)·현풍(玄風)·죽산(竹山)·고창(高敞)·평산(平山)·영천(永川)·여주(驪州)·신녕(新寧)·덕산(德山) 등 20여 본이 현존한다.
그러나 해평·무송·칠원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은 모두가 파평윤씨에서 분적되었다고 하며,
그 중 남원윤씨·함안윤씨·야성윤씨·신녕윤씨 등은 파평윤씨로 환보(還譜)하였다고 한다.
윤씨는 파평윤씨의 분적종을 포함한 파평계가 전체 윤씨 인구 중에서 가장 많고,
해평윤씨가 다음을 차지한다.
윤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592명에 상신 18명, 문형(文衡:大提學) 6명, 왕비(폐비 1명 포함) 6명, 부마 7명, 봉군 7명을 배출하였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 9만 143가구, 51만 6985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8위였고, 85년도 조사에서는 83만 4081명, 전국 인구구성비 2.1 %로 274성 중 역시 제8위였다.
파평윤씨】
시조는 고려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諱신달(諱莘達)이며, 현손 諱관(諱瓘)은 고려 중엽의 문무를 겸비한 명장으로 파평윤씨의 중시조이다. 아들 7형제를 두었으며 아랫대로 내려가면서 수십 파로 분파되었다.
파평윤씨 가운데서 주로 판도공파(版圖公派:諱承禮)와 소정공과(昭靖公派:諱坤)에서 대대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이 두 파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여 파평윤씨의 약 80 %를 차지한다.
판도공파는 諱승례(諱承禮)의 아들대에서 다시 제학공파(提學公派:諱珪)·부윤공과(府尹公派:諱普老)·정정공파(貞靖公派:)로 갈라지며, 그 중 정정공파가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집안이다. 諱번()은 세조의 국구로서 그의 맏아들 諱사분(諱士昐)은 우의정, 둘째 諱사균(諱士均)은 예조판서, 셋째 諱사흔(諱士昕)이 우의정이 되어 형제간에 정승을 지냈다.
그러나 뒤에 諱사분과 諱사흔 두 집안에서 같은 시기에 각각 왕비가 나와, 왕실을 배경으로 대굅?소윤으로 갈라져 일가상잔의 비극이 일어났다.
諱사분의 증손 諱임(諱任)은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오빠이며, 장경왕후는 諱여필(諱汝弼)의 딸로서 세자를 낳고 산후병으로 죽었다. 장경왕후의 뒤를 이어 諱사흔의 증손인 諱지임(諱之任)의 딸이 제2계비로 책봉되어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되었다. 문정왕후가 아들 경원대군(慶源大君:明宗)을 낳은 뒤로 장경왕후의 오빠 諱임을 중심으로 한 일파,
즉 대윤과 문정왕후의 동생 諱원형(諱元衡)을 중심으로 한 소윤이 정치적 암투를 벌였다.
소정공파는 諱승례의 형 諱승순(諱承順)의 아들 諱곤(諱坤)의 후손이다.
소정공 諱곤은 정종 때 제2차 왕자의 난에 방원(芳遠)을 도와 좌명공신에 책록, 이조판서를 지냈다. 손자 諱호(諱濠)는 성종의 국구로서 딸이 성종비 정현왕후(貞顯王后)가 되면서 돈령부영사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성종 때 영의정을 지낸 諱필상(諱弼商)의 증손 諱현(諱鉉)은 명종 때 호조판서를 지내고, 선조 때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돈령부영사에 이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이 밖에 諱사로(諱師路)는 세종의 딸 정현옹주(貞顯翁主)와 결혼하여 영천군(鈴川君)에 봉해지고, 세조 즉위년 좌익공신에 책록되고 좌찬성·중추부영사에 이르렀다. 이조판서 諱강(諱絳)과 다섯 아들 諱지미(諱趾美)·諱지선(諱趾善)·諱지완(諱趾完)·諱지경(諱趾慶)·諱지인(諱趾仁) 등이 뛰어났으며, 특히 諱지선·諱지완의 형제 정승이 유명하다.
諱지선은 현종 때 병조·이조·공조판서를 거쳐, 숙종 때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諱지완은 어영대장·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우의정에 오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한편 숙종 때 호조참판을 지낸 諱비경(諱飛卿)의 손자 諱봉구(諱鳳九)·諱봉오(諱鳳五)·諱봉조(諱鳳朝), 그리고 증손 諱심형(諱心衡) 등이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이다.
諱봉구는 강문8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숙종 때 집의(執義)·찬선(贊善) 등을 지내고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그의 아우 諱봉오는 영조 때 대사헌·우참찬 등을 지냈으며, 諱봉조는 암행어사·대사간 등을 지내고, 영조 때 부제학이 되고 대제학에 이르렀다. 또 諱심형은 영조 때 부제학·예조참판등을 역임하였다.
노성윤씨(魯城尹氏)란 노성(魯城:論山)에 세거한 파평윤씨 諱돈(諱暾)의 후손을 가리키며, 충남에서는 학자 집안으로 알려졌다.
諱돈은 선조 때 대사헌·공조판서를 지냈으며, 그의 다섯 손자 가운데 특히 諱황(諱煌)은 아우 諱전(n)과 함께 학자로 유명하다.
諱황의 여덟 아들 중 諱순거(諱舜擧)·諱문거(諱文擧)·諱선거(諱宣擧) 세 아들이 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諱문거는 효종 때 동래부사를 지내고 경학(經學)·성리학·서예에 뛰어났고, 선거는 거유로서 숙종 때 예송(禮訟)을 둘러싼 대립에서 중립을 지켰다.
그의 아들 諱증(諱拯)은 숙종 때 대사헌·이조판서·우의정 등에 임명되었으나 한번도 취임하지 않았으며, 왕과 한번의 배면(拜面)도 없이 상신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諱증은 서인이 노·소론으로 분당하자 송시열의 노론에 대항하여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아들 諱행교(諱行敎)도 대사헌이 되었다.
이 밖에도 정승급 인물로는 諱인경(諱仁鏡)·諱동도(諱東度) 등이 있다. 諱인경은 각조의 판서를 거쳐 인종 때 좌의정·영의정이 되고,
명종이 즉위하자 위사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諱동도는 영조 때 대사간·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학자로는 諱정(諱鼎)·諱경남(諱景男)·諱낙(諱洛) 등이 유명하다. 근세인물로는 1932년 상하이에서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등을 폭사시킨 의사 諱봉길(諱奉吉)이 있다.
【해평윤씨】
시조는 고려시대 고종·원종을 섬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사공(守司空) 좌복야(左僕射) 공부판사(工部判事) 諱군정(諱君正)이다.
諱군정의 증손대에서 문영공파(文英公派:諱之賢)와 충간공파(忠簡公派:諱之彪)의 양파로 갈라진다. 해평윤씨가 배출한 조선의 상신 6명, 문형 3명 중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諱은보(諱殷輔)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諱승훈(諱承勳)만이 문영공파에 속하고,
나머지는 모두 충간공파에서 나왔다.
충간공파에서도 선조 때 영의정 諱두수(諱斗壽)의 후손인 오음공파(梧陰公派)와, 그의 아우로 선조 때 대제학을 지낸 諱근수(諱根壽)의 후손인 월정공파(月汀公派)의 양파가 번창하여, 후손이 해평윤씨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諱두수의 다섯 아들 諱방(諱昉)·諱흔(諱昕)·諱휘(諱暉)·諱훤(諱暄)·諱오(諱旿) 등이 모두 등제 현달하였다.
그 중에서도諱방이 인조 때 영의정을 지냄으로써 부자 영상으로 이름을 떨쳤다.
諱방은 도승지·한성판윤·형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에 반대하여 은퇴하였으며, 인조반정으로 예조판서에 등용,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지냈다.
諱흔은 우승지를 지내고 계축옥사로 파직되었다가, 역시 인조반정 뒤 예조참판·중추부지사 등을 지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諱휘는 인조를 호종, 적진을 왕래하면서 화의를 교섭하였고, 뒤에 형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에 이르고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諱훤은 병조판서, 諱오는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오음공파에서 뛰어난 인물을 살펴보면,
치천공파(稚川公派)인 諱방의 아들 諱이지(諱履之)가 돈령부판사, 諱신지(諱新之)가 선조의 부마로 시·서·화에 능하였다.
諱신지의 아들 諱지()가 이조참판,
諱지의 5세손 諱명렬(諱命烈)도 이조참판,
諱명렬의 아들 諱치희(諱致羲)가 이조판서,
諱치희의 아들 諱용선(諱容善)이 한말 총리대신인 의정(諱議政)을 지냈다.
諱치희의 조카 諱의선(諱宜善)은 순조의 부마,
諱이지의 6세손 諱홍렬(諱弘烈)이 판서를 지냈다.
장주공파(長洲公派)인 諱휘(諱暉)의 손자 諱계()와 諱계의 아들 諱세기(諱世紀)가 다같이 병조판서를 지냈다.
諱세기의 5세손 諱치용(諱致容)은 공조판서,
그의 아우 諱치정(諱致定)은 이조판서,
휘치용의 아들 諱우선(諱宇善)도 이조판서를 지냈다.
諱계의 손자 諱급(諱汲)도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글씨에 뛰어나 윤상서체(尹尙書體)를 이룩하였다. 諱급의 종손 諱시동은 정조 때 각조의 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백사공파(白沙公派)인 諱훤의 아들 諱순지(諱順之)는 예조판서·
대제학, 諱훤의 증손 諱유(諱游)는 이조판서,諱 순(諱淳)은 이조판서를 거쳐 대제학을 지냈다.
諱근수는 선조 때 동부승지를 거쳐 대사성에 오르고, 부제학·대사헌·형조판서·양관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한편 문영공파의 인물로는 諱은보가 영의정,
諱은보의 종손 諱승길(諱承吉)이 찬성,
그의 아우 諱승훈(諱承勳)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근세인물로는 윤비(尹妃:純宗妃)가 영의정 諱방의 후손이고,
諱치호(諱致昊)는 諱흔의 8세손이다. 그의 아버지 諱웅렬(諱雄烈)은 한말에 군부대신이었다.
【남원윤씨】
시조는 장군 諱관(尹瓘)의 증손 諱위(諱威)이다.
신종 때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호남안렴사가 되어 남원의 적을 토평하고 남원군에 봉해진 뒤, 자손들이 관적을 남원으로 하였다.
그의 7세손 諱형(諱衡)이 형조·이조판서를 지냈으며,
諱위의 후손 諱섬(諱暹)은 선조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들어가 태조의 조상이 이인임(李仁任)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바로잡아, 그 공으로 광국공신 2등에 책록되고 사복시정을 지냈다.
諱섬의 손자 諱집(諱集)은 척화론자로서 청나라에 잡혀가서 장렬한 죽음을 하여 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과 함께 3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이 밖에도 이조판서·양관대제학을 지낸 諱행임(諱行恁),
예조·이조판서·중추부지사를 역임한 諱정현(諱定鉉),
대사성·이조판서·돈령부판사를 지낸 휘병정(諱秉鼎), 남인의 거물이며 대사헌·이조판서를 역임한 諱전(諱鐫) 등 많은 인물이 나왔다.
【칠원윤씨】
시조는 신라 때 태자태사(太子太師) 諱시영(諱始榮)이며,
그의 후손 諱수(諱秀)는 고려 충렬왕 때 군부판서(軍簿判書)·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을 지냈다.
諱 수의 증손 諱저(諱抵)는 태조의 잠저시부터 시종한 인연으로 상장군이 되고 제2차 왕자의 난 때 태종을 도와 좌명공신 3등에 책록, 찬성사가 되었다.
諱수의 6세손 諱석보(諱碩輔)는 옥당(玉堂)·직제학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그의 아들 諱풍형(諱豊亨)은 관찰사·부제학을 역임하였다.
諱석보의 증손 諱탁연(諱卓然)은 명종 때 춘추관기사관으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옥당·3도관찰사·형조·호조판서를 지냈으며, 선조 때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칠계군(漆溪君)에 봉해졌다.
諱수의 14세손 諱지술(諱志述)은 숙종 때 유생으로 신임사화에서 화를 입었으며, 임창(任敞)·이의연(李義淵)과 함께 3포의(三布衣)로 일컬어졌다.
【무송윤씨】
시조는 고려시대 보승낭장(保勝郞將)으로 호장(戶長)을 지낸諱양비(諱良庇)이다.
그의 증손 諱택(諱澤)은 정당문학·첨의찬성사를 지냈고,
諱택의 손자 諱소종(諱紹宗)은 조선시대 병조전서(兵曹典書)로 《고려사》 편찬에 참여, 회군공신(回軍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諱소종의 아들 諱회(諱淮)는 세종 때 병조판서·대제학을 지냈는데 주호(酒豪)로 유명하였고, 그의 손자 諱자운(諱子雲)은 우의정·영의정을 지냈다.
諱자운의 5세손 諱형(諱泂)은 선조 때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 2등에 책록되고, 호조판서·중추부판사를 역임하였다.
【해남윤씨】
시조는諱존부(存富)이며,
후손 諱구(諱衢)가 중종 때 호당에 뽑히고 사성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諱의중(諱毅中)이 대사헌·대사간·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諱의중의 손자 諱선도(諱善道)는 시조(時調)의 대가로 유명하며, 한성서윤·예조참의·중추부첨지사 등을 역임하였고, 남인의 거두로서 예송(禮訟) 때는 송시열(宋時烈) 등과 대립하였다.
諱선도의 증손 諱두서(諱斗緖)는 숙종 때 화백으로서 심사정(沈師正)·정선(鄭敾)과 함께 3재(三齋)로 일컬어졌다.
함안윤씨의 시조는 문하시중을 지낸 諱돈(諱敦)이다.
후손 諱각(諱慤)은 조선 숙종 때 무과에 급제, 삼군수군통제사를 거쳐 총융사(摠戎使)를 지냈고, 의검(義儉)·諱태연(諱泰淵)은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지냈다.
연산군의 외조부인 諱기무(諱起畝)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 봉상시판사(奉常寺判事)를 지냈으며, 아들 諱구()는 참판을 지냈다.
해주윤씨는 서흥윤씨(瑞興尹氏)라고도 하며, 시조는 세종 때 중추부지사를 지낸 諱중부(諱重富)이다.
아들 諱희평(諱熙平)은 연산군 때 무과에 급제, 공조판서·중추부지사를 지냈다. 영천윤씨의 시조는 고려시대 호장 諱절생(諱切生)이다.
영천윤씨의 인물로는 태종 때 군수 諱순(諱淳), 성종 때의 이조참의 諱긍(諱兢), 선조 때 중추부참지사 諱빙(諱聘) 등이 있다.
예천윤씨의 시조는 추밀원부사를 지내고 증례빈시소윤(贈禮賓寺少尹)인 諱충(諱忠)이다.
증손 諱상(諱祥)은 태조 때 문과에 급제, 대사성·예문관제학·성균관박사를 지냈으며, 성리학과 역학(易學)에 밝아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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