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 노종파(魯宗派)와 종학당(宗學堂) 소개(충남 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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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주 조회 3,482 작성일 07-07-09 00:00본문
인테넷파평윤씨 홈페지에 여범님이 정리하여 올려둔 내용을
방계 파평윤씨 자료로 소개합니다.
본문중의 홈페지 개편과 더불어 많은 문중의 직계및방계의 자료도 이번 기회에 발굴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노종파의 형성
파평윤씨 중에서도 조선 중기 이후 주목되는 노종 오방파는 충청동 노성현(니산현)에 세거했던 가계이다. 노성에 근거와 태반을 마련한 이들 노종5방파는 조선중,후기 니산(노성),금산,연산, 등 공주목의 남부 일대에서 활발한 사족활동을 전개 하였고, 이에 대해 우암 송시열이 회덕향안 懷德鄕案 서문(1672)에서
- 내가 생각하건데 호서에는 예로부터 3大族이라 일컫는 바가 있었으니 연산의 김씨, 니산(노성)의 윤씨,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회덕의 송씨이다 -
라고 호서지방의 대표적인 사족으로 지목할 만큼 명성을 얻고 있었다.(충청도를 양반 고장이라 부르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노종파가 충남 노성지방에 자리 잡게 된 것은 尹暾(1519-1577) 때였다. 윤돈은 尹先智(1501-1568)와 어머니 평산 신씨 사이에서 3형제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윤선지는 무과에 급제한 뒤 형조정랑과 좌부승지를 역임하였으며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고, 정주목사, 안동부사, 충청병사와 수사를 지냈던 인물이다.
윤돈의 형 尹曦와 아우 尹昱은 경기도 파주에서 살았고, 윤돈 만이 통정대부 僉正 柳淵의 2녀 문화 류씨와 결혼하면서 바로 처향인 노성 근방의 니산현 득윤면 당후촌(현 곽석면 득윤리)로 1538년경 이주하면서 노성지역과 처음 인연을 맺는다.
그는 결혼 직후인 1540~1550년대 어간에 노성에 정착하였다고 생각된다. 당시 사정을 자세히 전해주는 정확한 기록은 거의 없지만, 그런 중에도 다행히 처가로부터 윤돈이 재산을 분배받는 和會文書(分財記)가 전해지고 있어 주목된다.
이 화회문서는 장인이었던 류연의 3년상을 마친 1573년(선조7년) 8월12일에 자녀들이 모여서 처가 재산을 나누는 문서인데, 이 문서에 의하면 류연은 장녀(韓汝獻 妻), 차녀(尹暾 妻), 3남(柳瑞鳳)의 2녀1남을 두었는데 분재 당시 한여헌과 류서봉은 이미 고인이었다. 그리하여 장녀와 윤돈, 그리고 류서봉의 처 이씨가 참여하였고, 윤돈의 아들인 尹昌世도 집필로 참여하고 있다.
이 문서의 내용을 보면
1) 奉祀條로 전답 8마지기와 노비2구.
2) 장녀(韓汝獻 처) 몫으로는 전답 207마지기와 노비 23구.
3) 차녀(尹暾 처) 몫으로는 전답 174마지기와 노비17구.
4) 3남 류서봉 몫으로는 전답179마지기와 노비(수불명)
으로 나뉘어졌다.
처가로부터 많은 재산을 분배받은 윤돈은 3남인 유서봉이 絶孫되자 봉사조의 재산과 모든 재산은 윤창세의 5남 尹熺(典簿公)에게 상속 되었고, 류첨정(류연)댁 봉제사도 윤희가 담당했다.
윤돈은 59세를 일기로 1577년(선조10)에 죽었고, 그의 아들 윤창세(參判公,1543-1593)는 광석면 득윤리에서 현재의 노성면 병사리 비봉산 자락으로 터전을 다시 옮겼다.
바로 이 윤돈-윤창세의 가계를 이어 노종5방파가 파생 되는데, 윤창세의 아들들인
1) 설봉공 수 燧
2) 문정공 황 煌
3) 충헌공 전 烇
4) 서윤공 흡 火+翕
5) 전부공 희 熺
의 5파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 오방파 형성기인 16세기 ~ 17세기 전기는 호란과 청조의 압력으로 국기가 흔들리는 혼란기로서 노종파 인물들은 척화운동을 주도, 척화가문으로서도 명성을 날렸다. 윤황은 척화상소문제 때문에 유배생활을 하였고 윤전은 강화에서 청군과 대치 중 순절했으며, 윤황의 아들인 윤선거의 처 공주이씨는 강화에서 自盡 순절하는 등 사족가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윤창세의 아들이 오형제, 손자인 거(擧)자 항렬이 22명, 다음 代인 才변 항렬이 50 여명에 이르는 등 그 수에서도 크게 번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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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學堂종학당
종학당은 노성면 병서리에 위치하고 있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파평윤씨의 문중서당이다, 파평윤씨 종중의 자녀와 문중의 내외척, 처가의 자녀들까지도 합숙, 교육시키기 위해 건립되었다. 그 창립 연대는 최근 숭정 원년의 상량문이 발견되어 1628년경 童土 尹舜擧(1956-1688)가 건립한 것으로 확인이 되고 있다. 16세기 중반 니산에 터를 잡은 파평윤씨 노종파가 불과 2-3세대 만에 일약 조선의 명문가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바로 종학당의 문중교육에 힘입은 바 컸다고 할 수 있다.
노종파의 기틀을 마련한 최고의 수훈자는 동토 윤순거로 윤황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백부인 尹燧에게 입계한 그는 4촌 尹元擧와 아우 尹宣擧와 같이 종약 및 가훈을 제정하고 종학을 창설하였으며, 초대 당장이 되어 책, 기물, 재산 등을 마련하는 등 초창기학사운영의 기반을 닦았다. 윤순거는 이와 함께 재실(병사)와 의창, 정수루 등의 창건에 전력하여 완공하였지만, 건립당시 그가 관직에 있었으므로 감역은 아우인 尹後擧에게 전적으로 맡겨 완공하였다고 전한다.
이러한 종학당의 교육이념과 체계는 1645년에 만들어진 파평윤씨 노종파 宗約과 明齋 尹拯선생이 1680년과 1701년에 각각 만들어 현재 종학당에 걸린 初學畵一之圖와 爲學之方圖를 통하여 상세히 엿볼 수가 있다. 종학의 전통은 명재 윤증때에 이르러 더욱 활발하게 운영되는 모습인데, 당시까지는 주로 병사와 정수암이 주요 거접처로 활용되었고, 독립된 서당으로서의 건물을 갖추는 것은 유봉에 건립되는 1817년의 종학당이 단초가 된다.
이후 현재의 위치로 이건, 규모를 일신하게 된 것은 1829년 과천공 윤정규 등에 의해서였다. 이때 盤湖 尹光顔은 종학당 재건의 건축 자재와 400여권의 서책, 그리고 200석의 전답을 출연하였고, 이를 계기로 1829년 그의 4종질 果川 尹正圭가 4칸 전후퇴의 건물을 마련함으로써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1853년과 1893년 두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1915년 대화재로 백록당과 정수루 일부가 불에 탔다.
종학당은 1987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293호로 지정되었다가 1977년 원래의 유서대로 종학당과 백록당,정수루를 하나로 합하여 유형문화재 제152호로 재지정 되었고, 시비의 지원을 받아 1999년에는 종학당, 2000년에는 정수루를 각각 원형복원 하였고, 이를 계기로 2001년 강당인 보인당과 함께 이 일원을 종학원으로 통칭하고 있다.
종학당 변천사
1) 현재의 종학원에 건립 운영된 정수루와 백록당(1628-1645)
2) 종약 창설과 종학의 체계화를 통해 확립된 종학당(1645-1720년어간)
3) 유봉 영당에 건립한 종학당(1817-1628)
4) 현재의 위치에 재건(1829-1853-1893)
이러한 역사를 지닌 종학당에서는 창건 후 300여 년간 헤일 수 없는 많은 인재를 배출한 요람이었으니 노종파의 대과 급제자만도 47명으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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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종파 사람들
* 노종파 문과 급제자
23세 : 윤수(尹燧), 윤황(尹煌), 윤찬(尹燦)=>전烇
24세 : 윤문거(尹文擧)
25세 : 윤변(尹抃), 윤절(尹晢), 윤진(尹搢),
26세 : 윤경교(尹敬敎), 윤성교(尹誠敎), 윤행교(尹行敎), 윤석교(尹碩敎), 윤혜교(尹惠敎)
윤민교(尹敏敎), 윤서교(尹恕敎),
27세 : 윤동형(尹東衡), 윤동준(尹東浚), 윤동도(尹東度), 윤동섬(尹東暹),
윤동성(尹東星)=>동승東昇, 윤동만(尹東晩),
28세 : 윤광운(尹光運), 윤광찬(尹光纘), 윤광소(尹光紹), 윤광례(尹光禮), 윤광섬(尹光暹),
윤광승(尹光昇), 윤광보(尹光普), 윤광안(尹光顔),
29세 : 윤혜규(尹惠圭), 윤심규(尹心圭), 윤인기(尹寅基)=>尙圭, 윤상규(尹庠圭),
윤명규(尹命圭), 윤흥규(尹興圭),
30세 : 윤경진(尹景鎭), 윤정진(尹正鎭), 윤성진(尹成鎭),
31세 : 윤자경(尹滋畊), 윤자승(尹滋承), 윤자덕(尹滋悳)
32세 : 윤상열(尹相說), 윤상현(尹相賢)-2회, 윤상익(尹相翊), 윤상철(尹相澈)
윤상만(尹相萬), 윤상연(尹相衍)
33세 : 윤두병(尹斗炳)
* 상신(政丞)
윤증 (숙종조 우의정 제수 => 不起), 윤동도 (영조조 영의정)
* 경연관
윤선거(효종), 윤원거, 윤순거(현종), 윤증(숙종), 윤동수, 윤동원(영조)
* 기사록(耆老所)
윤동형(80세), 윤동섬(83세), 윤광소(79세), 윤자승(72세)
* 忠臣
윤전(병자호란 순절신) 丙子胡亂以弼善扈嬪宮入江都城陷被執罵賊死之贈吏判諡忠憲
* 判書
윤혜교(吏曹), 윤동섬(吏曹), 윤동석(工曹), 윤광보(禮曹)
윤자승(吏曹), 윤자덕(吏曹)
* 漢城府 判尹
윤동형(영조), 윤광보(순조), 윤상규(헌종), 윤자승(고종)
* 증시록(諡號)
윤황(文正), 윤전(忠憲), 윤문거(忠敬), 윤선거(文敬), 윤증(文成),
윤혜교(文溫), 윤동도(靖文), 윤광보(孝憲), 윤자덕(文獻)
* 贈 議政
윤황(贈領議政), 윤선거(贈領議政), 윤혜교(贈領議政), 윤주진(贈右議政)
* 태사공 묘역 봉축, 봉강재 창건 및 중수
1740 26世 윤혜교(당시 이조참의) 묘역 봉축, 묘비 撰
1752 28世 윤광소(당시 안동부사) 분암(봉서암) 및 재실 창건.
1762 27世 윤동도(당시 경상감사) 수축.
1763 28世 윤광안(당시 경상감사) 위토확장, 재사중수.
* 문숙공 묘역 봉축
26세 윤면교(당시 한성부 우윤) 상소, 27世 윤동도(당시 우의정) 상주 => 묘역 봉축
* 족보 편찬
1. 己亥大譜(중종23년, 1539년)
2. 乙酉大譜(선조18년, 1585년)
3. 甲戌大譜(인조12년, 1634년) 문정공 팔송 윤황 편찬.
4. 壬戌大譜(숙종8년, 1682년) 문성공 명재 윤증 서문.
5. 丙午大譜(영조2년, 1726년) 문온공 윤혜교 수보.
6. 癸未大譜(영조39년, 1763년) 소곡 윤광소 전질20권으로 수보 간행.
7. 庚寅大譜(순조30년, 1830년) 전질43권으로 간행.
8. 庚申大譜(1920년) 32世 참판공 윤상익 주관하에 전질61권이 편찬.
9. 己亥綜合譜(1959) 편찬 간행.
방계 파평윤씨 자료로 소개합니다.
본문중의 홈페지 개편과 더불어 많은 문중의 직계및방계의 자료도 이번 기회에 발굴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노종파의 형성
파평윤씨 중에서도 조선 중기 이후 주목되는 노종 오방파는 충청동 노성현(니산현)에 세거했던 가계이다. 노성에 근거와 태반을 마련한 이들 노종5방파는 조선중,후기 니산(노성),금산,연산, 등 공주목의 남부 일대에서 활발한 사족활동을 전개 하였고, 이에 대해 우암 송시열이 회덕향안 懷德鄕案 서문(1672)에서
- 내가 생각하건데 호서에는 예로부터 3大族이라 일컫는 바가 있었으니 연산의 김씨, 니산(노성)의 윤씨,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회덕의 송씨이다 -
라고 호서지방의 대표적인 사족으로 지목할 만큼 명성을 얻고 있었다.(충청도를 양반 고장이라 부르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노종파가 충남 노성지방에 자리 잡게 된 것은 尹暾(1519-1577) 때였다. 윤돈은 尹先智(1501-1568)와 어머니 평산 신씨 사이에서 3형제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윤선지는 무과에 급제한 뒤 형조정랑과 좌부승지를 역임하였으며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고, 정주목사, 안동부사, 충청병사와 수사를 지냈던 인물이다.
윤돈의 형 尹曦와 아우 尹昱은 경기도 파주에서 살았고, 윤돈 만이 통정대부 僉正 柳淵의 2녀 문화 류씨와 결혼하면서 바로 처향인 노성 근방의 니산현 득윤면 당후촌(현 곽석면 득윤리)로 1538년경 이주하면서 노성지역과 처음 인연을 맺는다.
그는 결혼 직후인 1540~1550년대 어간에 노성에 정착하였다고 생각된다. 당시 사정을 자세히 전해주는 정확한 기록은 거의 없지만, 그런 중에도 다행히 처가로부터 윤돈이 재산을 분배받는 和會文書(分財記)가 전해지고 있어 주목된다.
이 화회문서는 장인이었던 류연의 3년상을 마친 1573년(선조7년) 8월12일에 자녀들이 모여서 처가 재산을 나누는 문서인데, 이 문서에 의하면 류연은 장녀(韓汝獻 妻), 차녀(尹暾 妻), 3남(柳瑞鳳)의 2녀1남을 두었는데 분재 당시 한여헌과 류서봉은 이미 고인이었다. 그리하여 장녀와 윤돈, 그리고 류서봉의 처 이씨가 참여하였고, 윤돈의 아들인 尹昌世도 집필로 참여하고 있다.
이 문서의 내용을 보면
1) 奉祀條로 전답 8마지기와 노비2구.
2) 장녀(韓汝獻 처) 몫으로는 전답 207마지기와 노비 23구.
3) 차녀(尹暾 처) 몫으로는 전답 174마지기와 노비17구.
4) 3남 류서봉 몫으로는 전답179마지기와 노비(수불명)
으로 나뉘어졌다.
처가로부터 많은 재산을 분배받은 윤돈은 3남인 유서봉이 絶孫되자 봉사조의 재산과 모든 재산은 윤창세의 5남 尹熺(典簿公)에게 상속 되었고, 류첨정(류연)댁 봉제사도 윤희가 담당했다.
윤돈은 59세를 일기로 1577년(선조10)에 죽었고, 그의 아들 윤창세(參判公,1543-1593)는 광석면 득윤리에서 현재의 노성면 병사리 비봉산 자락으로 터전을 다시 옮겼다.
바로 이 윤돈-윤창세의 가계를 이어 노종5방파가 파생 되는데, 윤창세의 아들들인
1) 설봉공 수 燧
2) 문정공 황 煌
3) 충헌공 전 烇
4) 서윤공 흡 火+翕
5) 전부공 희 熺
의 5파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 오방파 형성기인 16세기 ~ 17세기 전기는 호란과 청조의 압력으로 국기가 흔들리는 혼란기로서 노종파 인물들은 척화운동을 주도, 척화가문으로서도 명성을 날렸다. 윤황은 척화상소문제 때문에 유배생활을 하였고 윤전은 강화에서 청군과 대치 중 순절했으며, 윤황의 아들인 윤선거의 처 공주이씨는 강화에서 自盡 순절하는 등 사족가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윤창세의 아들이 오형제, 손자인 거(擧)자 항렬이 22명, 다음 代인 才변 항렬이 50 여명에 이르는 등 그 수에서도 크게 번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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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學堂종학당
종학당은 노성면 병서리에 위치하고 있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파평윤씨의 문중서당이다, 파평윤씨 종중의 자녀와 문중의 내외척, 처가의 자녀들까지도 합숙, 교육시키기 위해 건립되었다. 그 창립 연대는 최근 숭정 원년의 상량문이 발견되어 1628년경 童土 尹舜擧(1956-1688)가 건립한 것으로 확인이 되고 있다. 16세기 중반 니산에 터를 잡은 파평윤씨 노종파가 불과 2-3세대 만에 일약 조선의 명문가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바로 종학당의 문중교육에 힘입은 바 컸다고 할 수 있다.
노종파의 기틀을 마련한 최고의 수훈자는 동토 윤순거로 윤황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백부인 尹燧에게 입계한 그는 4촌 尹元擧와 아우 尹宣擧와 같이 종약 및 가훈을 제정하고 종학을 창설하였으며, 초대 당장이 되어 책, 기물, 재산 등을 마련하는 등 초창기학사운영의 기반을 닦았다. 윤순거는 이와 함께 재실(병사)와 의창, 정수루 등의 창건에 전력하여 완공하였지만, 건립당시 그가 관직에 있었으므로 감역은 아우인 尹後擧에게 전적으로 맡겨 완공하였다고 전한다.
이러한 종학당의 교육이념과 체계는 1645년에 만들어진 파평윤씨 노종파 宗約과 明齋 尹拯선생이 1680년과 1701년에 각각 만들어 현재 종학당에 걸린 初學畵一之圖와 爲學之方圖를 통하여 상세히 엿볼 수가 있다. 종학의 전통은 명재 윤증때에 이르러 더욱 활발하게 운영되는 모습인데, 당시까지는 주로 병사와 정수암이 주요 거접처로 활용되었고, 독립된 서당으로서의 건물을 갖추는 것은 유봉에 건립되는 1817년의 종학당이 단초가 된다.
이후 현재의 위치로 이건, 규모를 일신하게 된 것은 1829년 과천공 윤정규 등에 의해서였다. 이때 盤湖 尹光顔은 종학당 재건의 건축 자재와 400여권의 서책, 그리고 200석의 전답을 출연하였고, 이를 계기로 1829년 그의 4종질 果川 尹正圭가 4칸 전후퇴의 건물을 마련함으로써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1853년과 1893년 두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1915년 대화재로 백록당과 정수루 일부가 불에 탔다.
종학당은 1987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293호로 지정되었다가 1977년 원래의 유서대로 종학당과 백록당,정수루를 하나로 합하여 유형문화재 제152호로 재지정 되었고, 시비의 지원을 받아 1999년에는 종학당, 2000년에는 정수루를 각각 원형복원 하였고, 이를 계기로 2001년 강당인 보인당과 함께 이 일원을 종학원으로 통칭하고 있다.
종학당 변천사
1) 현재의 종학원에 건립 운영된 정수루와 백록당(1628-1645)
2) 종약 창설과 종학의 체계화를 통해 확립된 종학당(1645-1720년어간)
3) 유봉 영당에 건립한 종학당(1817-1628)
4) 현재의 위치에 재건(1829-1853-1893)
이러한 역사를 지닌 종학당에서는 창건 후 300여 년간 헤일 수 없는 많은 인재를 배출한 요람이었으니 노종파의 대과 급제자만도 47명으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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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종파 사람들
* 노종파 문과 급제자
23세 : 윤수(尹燧), 윤황(尹煌), 윤찬(尹燦)=>전烇
24세 : 윤문거(尹文擧)
25세 : 윤변(尹抃), 윤절(尹晢), 윤진(尹搢),
26세 : 윤경교(尹敬敎), 윤성교(尹誠敎), 윤행교(尹行敎), 윤석교(尹碩敎), 윤혜교(尹惠敎)
윤민교(尹敏敎), 윤서교(尹恕敎),
27세 : 윤동형(尹東衡), 윤동준(尹東浚), 윤동도(尹東度), 윤동섬(尹東暹),
윤동성(尹東星)=>동승東昇, 윤동만(尹東晩),
28세 : 윤광운(尹光運), 윤광찬(尹光纘), 윤광소(尹光紹), 윤광례(尹光禮), 윤광섬(尹光暹),
윤광승(尹光昇), 윤광보(尹光普), 윤광안(尹光顔),
29세 : 윤혜규(尹惠圭), 윤심규(尹心圭), 윤인기(尹寅基)=>尙圭, 윤상규(尹庠圭),
윤명규(尹命圭), 윤흥규(尹興圭),
30세 : 윤경진(尹景鎭), 윤정진(尹正鎭), 윤성진(尹成鎭),
31세 : 윤자경(尹滋畊), 윤자승(尹滋承), 윤자덕(尹滋悳)
32세 : 윤상열(尹相說), 윤상현(尹相賢)-2회, 윤상익(尹相翊), 윤상철(尹相澈)
윤상만(尹相萬), 윤상연(尹相衍)
33세 : 윤두병(尹斗炳)
* 상신(政丞)
윤증 (숙종조 우의정 제수 => 不起), 윤동도 (영조조 영의정)
* 경연관
윤선거(효종), 윤원거, 윤순거(현종), 윤증(숙종), 윤동수, 윤동원(영조)
* 기사록(耆老所)
윤동형(80세), 윤동섬(83세), 윤광소(79세), 윤자승(72세)
* 忠臣
윤전(병자호란 순절신) 丙子胡亂以弼善扈嬪宮入江都城陷被執罵賊死之贈吏判諡忠憲
* 判書
윤혜교(吏曹), 윤동섬(吏曹), 윤동석(工曹), 윤광보(禮曹)
윤자승(吏曹), 윤자덕(吏曹)
* 漢城府 判尹
윤동형(영조), 윤광보(순조), 윤상규(헌종), 윤자승(고종)
* 증시록(諡號)
윤황(文正), 윤전(忠憲), 윤문거(忠敬), 윤선거(文敬), 윤증(文成),
윤혜교(文溫), 윤동도(靖文), 윤광보(孝憲), 윤자덕(文獻)
* 贈 議政
윤황(贈領議政), 윤선거(贈領議政), 윤혜교(贈領議政), 윤주진(贈右議政)
* 태사공 묘역 봉축, 봉강재 창건 및 중수
1740 26世 윤혜교(당시 이조참의) 묘역 봉축, 묘비 撰
1752 28世 윤광소(당시 안동부사) 분암(봉서암) 및 재실 창건.
1762 27世 윤동도(당시 경상감사) 수축.
1763 28世 윤광안(당시 경상감사) 위토확장, 재사중수.
* 문숙공 묘역 봉축
26세 윤면교(당시 한성부 우윤) 상소, 27世 윤동도(당시 우의정) 상주 => 묘역 봉축
* 족보 편찬
1. 己亥大譜(중종23년, 1539년)
2. 乙酉大譜(선조18년, 1585년)
3. 甲戌大譜(인조12년, 1634년) 문정공 팔송 윤황 편찬.
4. 壬戌大譜(숙종8년, 1682년) 문성공 명재 윤증 서문.
5. 丙午大譜(영조2년, 1726년) 문온공 윤혜교 수보.
6. 癸未大譜(영조39년, 1763년) 소곡 윤광소 전질20권으로 수보 간행.
7. 庚寅大譜(순조30년, 1830년) 전질43권으로 간행.
8. 庚申大譜(1920년) 32世 참판공 윤상익 주관하에 전질61권이 편찬.
9. 己亥綜合譜(1959) 편찬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