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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루 복원에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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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원석(尹元錫) 조회 3,648 작성일 09-12-22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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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혼돈하여 대화루 자리에 태화루를 복원하는 울산시




울산시는 총사업비 412억을 들여서 울산시 중구 태화동 로얄예식장 일원에 건립하는 역사공원 안에는 대화루(大和樓)의 옛 누각을 태화루(太和樓)라는 이름으로 복원한다. 시민 공청회의 여론 수렴도 거쳤고, 용역을 맡은 울산대 도시건축연구소의 최종보고서는 밀양 영남루와 닮은 누각이 된다고 하였다. 태화교 아래 용금소의 화진(和津) 나루터(대화진:울산교부근 주진:학성교 부근) 에 나룻배도 띄운다니 복합역사공원의 공사가 끝나면 울산의 새로운 명소가 되리라 확신하지만 태화루의 누각 명칭에는 역사적인 사실을 혼돈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필자는 태화루에 얽인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본보의 독자기고란을 통해 처음으로 대화루가 태화루로 명칭이 변한 것은 조선조 후기 일제의 조종으로 개명되었다는 역사의 진실을 발표 하였다. 대화루를 태화루로 부르게 된 역사는 고작 100여년에 불과하지만 대화루는 신라 선덕여왕(632-647)때 대화사(大和寺)의 창건설화를 기준으로 임진왜란(1592)전 까지 거의 8,900여년의 세월을 지켜왔다. 이래도 태화루의 현판을 붙일 생각인가? 울산시의 역사관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서울의 조선 총독부(중앙청) 건물이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철거한 것을 생각하면, 울산시의 역사의식은 거꾸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한 번 대화루의 역사를 살펴보자. 대화루는 대화사의 종루나 문루로 건축되었다. 그러나 전설처럼 스쳐지나간 대화사의 소멸로 관리가 소홀했든 것이 틀림없다. 중종25년(1530)에 출간된 신증 동국여지승람 22권(울산군)에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과 학자를 지낸 권근(1352-1409)이 대화루의 절경을 찬양한 기문(記文)과 서거정(1420-1488)의 대화루 중신기(重新記)를 볼 수 있다. 서거정이 대화루를 오를 때는 대화루가 허물어져 종사들의 부축으로 억지로 올라가 “기둥과 대들보가 모두 썩고 꺽어져서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다”는 표현도 하였다. 서거정은 울산 최고의 절경 대화루의 허물어짐을 안타갑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훗날 대화루를 크고 넓게 새로이 칠한 울산 고을 원(宰) 박후의 중수를 소식을 접하고 울산 정치를 칭찬하고 중신기를 지어 주었다. 서거정은 조선전기의 문신과 학자로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모신 문장과 글씨가 능한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그래서 이휴정에 보관된 태화루 현판이 서거정의 글씨라는 울산지명사의 기술은 필적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시대가 맞지 않는 것이다. 수 백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몇 번의 대화루의 중수기가 있었지만 태화루의 현판은 단 한 번도 걸려본 적이 없는 대화루 자리에 일제가 만들어준 태화루 현판을 거는 것은 역사를 왜곡 시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태화루의 태(太)가 등장 한 것은 일본이 대륙침략의 길잡이와 토지 수탈을 목적으로 조선의 지형도를 간행하고 조선의 지명개명 작업을 하였다. 한성을 경성으로, 을지로의 옛 이름 구리개를 황금정통(黃金町通), 진고개는 혼마치,등 조선의 옛 명칭을 많이 지워 버렸다. 고종32년(1895) 일제의 조종에 의해 제정된 홍범14조의 선포이후 조선은 13도로 개편되었고 한일 합방후 조선통감부시대는 전국 면의 행정구역 개편과 명칭변경으로 1914년 새로운 면제도의 시행으로 조선시대의 전통을 완전히 말살하였다. 이후 태화강의 명칭이 바꾸어지면서 자연스레 태화루의 이름과 학성관의 현판에 태화루라는 글자가 등장한 것이다. 1894년 이전의 규장각에 보관된 울산호적장부에 기록된 울산의 동명을 보면 태화동의 명칭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일제 때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명치(明治)15년 일한서방(日韓書房)에서 발행된 최신조선지지 조선요람에는 “대화루는 읍 남(南) 18정(町)에 있고 은월봉은 대화진의 서쪽에 있다”고 되어있다. 이를 보아도 울산읍성 안에 대화루 현판이 있었다는 말이다. 조선후기의 최초 울산읍지는 영조11년(1735)에 울산부사 권상일이 편찬을 시작하여 10년 만에 학성지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고, 고종31년(1894)재간 되었으나 판본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인문과학원(1989)에서 발행한 조선시대 사찬읍지 총람 울산편 에는 1934년에 발행된 울산읍지가 영인되어 있다. 그래서 일제시대 필사본으로 만든 옛 읍지나 지도, 각종문헌에는 모두 태(太)자를 가필 한 것이다. 대(大)자나 태(太)자나 한자의 뜻이 같다는 말에 지금까지 울산민중들은 침묵하고 있었다. 태화루와 대화루는 같은 말인가. 34세 원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