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울산성(학성공원)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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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원석(尹元錫) 조회 4,881 작성일 09-12-27 23:05본문
임진왜란 최후의 승부처 울산성(蔚山城) 전투
임진왜란(1592-1598)의 발발
울산성(시지정 문화재 자료7호:울산왜성)은 중구 학성동 태화강변(太和江邊)의 해발 50여 미터의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성벽은 허물어지고 성(城)주변은 마구훼손 되어 있어 거이 원형을 찾을 수 없다. 북쪽 성벽이 일부 남아 있지만, 왜성 이란 이유로 우리들 머리 속에 점점 잊혀져 가고 있다. 임진왜란 때 왜(倭)군 주둔지 정도로 폄하 되었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편견이지만 울산성은 임진왜란(정유재란;丁酉再亂)의 조선침략 전쟁 중에 가장 처절한 전쟁터로 잊혀져 버린 역사(歷史)를 다시 한 번 조명하고자 한다. 임진왜란(1592年)이 일어나기 전, 조선시대의 한.일 관계를 보면 15,16세기 전반기까지의 160여년 간은 가까운 이웃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분야에 걸쳐 돈독한 유대관계를 유지한다. 이 시대가 일본의 무로마치(室町)시대. 1404년 아시카가막부(足利幕府)와 국교를 맺은 이후 왜인(년간5천명)들은 삼포(三浦;부산포 제포 염포)에 드나들면서 조선의 선진문화를 마음껏 섭렵한다. 대장경(大藏經) 불화(佛畵) 불상(佛像) 종(鍾)등의 물품과 피륙을 하사(下賜)하면서, 삼포에 입항, 출항 할 때까지의 식량과 막대한 경비를 직접부담하기 까지 한다. 무로마치시대 160여년 간의 선린관계를 짓밟은 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임진왜란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일본 통일을 목전에 두고 가신(아케치 미스히데)의 역모로 처참한 최후를 마치자, 통일 사업을 계승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0년 일본 전국을 장악하고, 오사카성(大阪城)과 교토(京都)에 웅장한 성곽을 건설하는 동시에 오랫동안 유명무실하든 천황을 행재 시키는 등, 최고의 실력자가 되었다. 그리고 명나라와 세계를 정복하려는 야망으로 오랫동안이나 구상하든 대륙 침략을 실행하였다. 비대해진 군사조직의 돌출구와 일생동안 통일전쟁에 집착한 망상이 함께 어우러진 것이다. 히데요시는 1590년(선조23년) 일본 천하통일을 축하하러온 조선통신사(황윤길 과 김성일)들에게 조선국왕의 방일과 “가도입명”(假道入明:조선의 길을 빌어서 명나라로 쳐들어간다)을 통보하였지만 조선의 조정은 당파싸움으로 일관, 정사 황윤길의 상소에 전혀 반응이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1년 10월 규슈(九州)북쪽 나고야(名護屋)에 대륙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를 건설하고 1592년 1월 조선 침략을 위한 준비한 3천여척의 선박과 33만명(조선출병 20만명 나고야성 예비병력 10만명 교토 수비병력 3만명)의 동원령을 내리고 전쟁준비에 착수하였다.
임란초기는 파죽지세(破竹之勢)
1592년 음력 4월12일 7백여 척의 배에 나누어 탄 조선 침략군은 오우라(大浦항)을 출발하였다.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등 서쪽 규수세력 1만8천7백명, 제2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등 중부 규수세력 1만2천8백명, 제3군 구로다(黑田)등 동쪽규수 세력 1만1천명, 제4군 1만4천명, 제5군 2만5천명, 제6군 1만5천7백명, 제7군은 주고쿠 세력의 3만명, 제8군 1만명, 제9군 1만1천5백명이 순서대로 출정하였다. 그리고 쓰시마의 조선말 통역사, 삼포해안의 일본어를 아는 조선주민들도 징발하였다. 4월13일 새벽에 기습작전으로 오전8시경 조선해안의 봉수대는 왜적침입을 알리는 연기를 품어 올렸지만, 부산성은 함락(정발 장군을 비롯한 수비병1천2백명 전사) 되었다. 조선왕조 개국 2백년 동안 태평 세월로 군비는 느슨했고, 명나라가 조선군의 총기무장과 사용을 금지하여 조선장병은 개개인은 용감했지만, 오다 노부나가가 개발한 총기전술은 당 할 수가 없었다. 동래성(東來城;부사 송상현), 기장, 밀양을 함락하고 연전연승하였다. 소문을 들은 울산 병영성(兵營城)의 경상좌병사 이각(李珏)이 전투한번 하지 않고 도망쳐 버리자 울산읍성과 병영성은 왜군들이 무혈 입성하였다. 조선군이 이토록 약했든 것은 조선왕조는 태평성대에 익숙해 군비부족과 조직적 결함이 그 원인이었다. 일본군은 충주(忠州) 전투(신립장군)을 제외하면 전투다운 전투 없이 부산에 상륙 한지 20일 만인 5월2일 유키나가의 제1군은 동대문, 기요마사의 제2군은 남대문을 통해 조선의 수도인 한성(漢城)을 점령하였다. 현해탄의 거친 파도를 막아주는 가베시마(加部島)를 바라보는 나고야성 천수각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면서 조선으로 건너갈 준비까지 하였으나, 이순신장군의 활약으로 재해권을 상실하여 위험하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등이 극구 말려 중지시켰다. 그대신 자기의 심복 세사람(마시다 나가모리, 이시다 미쓰나리, 오타니 노시타가)를 보냈다. 5월 중순에는 전침략군의 주력부대가 한양에 집결하여, 동서 2개 군단으로 편성하여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국왕을 쫒아 6월16일 평양에 입성하였다. 동해안 쪽으로 향한 가토 기요마사와 나베시마 나오시게 등은 끝도 없이 전진을 계속하여 마천령을 넘어 두만강에 가까운 회령에 도달하자, 여기에 놀란 회령부사 국경인 등은 그곳으로 피신한 두 왕자를 바치면서 항복한다. 가토 기요마사는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의 중국 땅까지 진출했다가 8월 하순 원산 부근으로 철수하여 겨울채비와 병참물자의 수송 등으로 전쟁은 몇 달 동안 소강 상태가 된다.
조.명 연합군의 반격과 의병들의 활약
임진왜란의 총 연출가 히데요시에게도 몇 가지 문제가 생긴 것이다. 생모 사망의 비보를 들은 히데요시는 조선전쟁의 지휘권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부탁하고 오사카로 돌아가 장례와 추모 행사를 가졌고, 둘째 양자인 히데가쓰가 조선의 거제도에서 죽었다는 소식도 접했다. 9월 하순의 조선북부는 벌써 쌀쌀한 바람이 불어 삼베옷을 입은 대부분의 규수병력들의 사기는 땅바닥에 떨어진 채로 겨울이 닥쳐왔다. 또한 일본의 대륙침략을 한반도에서 저지하기 위해, 임란 8개월만에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明軍) 10만명이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평양으로 진군하여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1593년 정월7일 조선군과 명군은 평양(平壤)을 탈환하고 추위와 굶주림으로 후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였다. 엄동설한이라 모피와 동물 가죽으로 된 방한복, 추위에 강한 몽고산 말은 최고의 무기였다. 한양까지 6백리 길을 좇겨 내려와 행주산성에서 대패한 후 벽제관 전투에서는 이겼다고 하나 개전 11개월 지난 1593년 3월 20일 한양에 집결한 정예전투부대를 점검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심복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는 아연질색 한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단은 6천6백 밖에 남지 않았고, 제2군단은 7천6백명,등 절반 이상을 11개월만에 상실했다. 남은 병력도 형편없었다. 부상자나 환자들이 즐비했고 무장들도 야위어 피골이 상접해 있었고, 군량미와 탄약이 거이 바닥나 전투능력을 상실한 허수아비 집단이었다. 부산과 한양을 연결하는 22개소의 병참선에 수만의 병력을 배치했지만 한양 쪽으로 한 톨도 수송되지 못했다. 행주산성에서 대패한지 보름 뒤인 1593년 2월 27일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토요도미 히데요시 양자 22세)는 무장 14명을 소집한 작전회의 석상에서 비참한 실상을 보고한다. “군량이 바닥나 앞으로 1개월 정확히 4월11일이면 좁쌀 한 알도 남지 않는다” “부산(釜山)의 군량은 운반하고 싶어도 인마(人馬)를 찾을 수 없고 도중의 산림 속에는 강도(義兵)가 많아 한 명의 연락병을 보내는 데도 곳곳의 성(城)으로부터 기병(騎兵) 3,40기 궁시(弓矢) 조총(鳥銃) 1,2백정이 딸리지 않을 수 없다” 보고하였다. 의병들의 활약이 침략군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준 것이다. 당시 산림이 우거져 각지 역의 지형에 능숙한 의병들 잠복은 큰 위협이 되었다.
휴전협상과 정유재란
병참선이 끊어져 패전이 확실한 시점이었지만, 가토 기요마사에게 잡혀 일본으로 압송된 임해군, 순화군 두 왕자의 인질문제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굴욕적인 휴전협정이 시작되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3만8천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1593년 4월 17일 한양에서 부산으로 철수명령을 내린다. 후퇴하면서 6월21일 9만여명의 대군으로 진주성을 공격하고 부산을 중심으로 조선해안의 여러 곳에 성을 쌓고 5만여명의 수비병력을 남긴 채 명나라 사신을 나고야성으로 불러들인다. 평화로운 조선을 피로 물들이고, 조선반도를 잿더미로 만든 일본 침략군들은 서생포와 부산 웅천등을 연결하는 해안주둔지를 확보하고 도망치듯 규슈로 철수하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명나라 사신들에게 자신의 망상을 드러냈다. 조선8도중 4도를 일본에 할양 할 것과, 명의 황녀, 조선의 세자 및 대신을 일본에 보낼 것 등을 요구하였다. 지루한 협상은 3년이나 끌었고, 선조29년(1596년)9월, 명의 사신들은 본국에 거짓 보고를 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나온 결론은 일본의 요구는 묵살되었다. 명나라는 조공과 함께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칙서와 금인(金印)를 전하자 크게 분노하여 재차로 조선침략을 명하였고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이것이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조선과 명도 강화교섭이 결렬된 것을 알고 전쟁준비에 돌입한다. 조선의 군총사령관(都元帥)에 행주산성의 용장 권율 장군이 임명되고 “견병청야지책”(堅摒淸野之策)을 써서 각지의 산성을 수복하고 읍촌 주민을 성안에 두었고, 특히 모든 식량은 일본군의 군량미 조달을 방지하였다. 임란초기에 평양성에서 10만석의 군량미가 유출된 것을 생각한 것이다. 명나라도 비왜병총관(備倭總兵官:대일방위군 사령관)에 마귀(麻貴)을 임명하고 14만명의 대군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선조30년(1597년) 정월15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군대는 서생포(西生浦)를 통해 상륙한다 3월 중순까지 14만1천5백명의 대군이 다시 상륙하여 동래 기장 울산, 등지를 점령하고 한양 쪽으로 북상했고, 해전에서도 이순신 없는 조선 수군을 간단히 괴멸시키고 승리하여 전라도까지 진격하였으나, 조명(朝明) 연합군의 반격으로 후퇴하면서, 10월초까지 울산과 순천을 잇는 조선의 해안지대 18곳에 왜성과 거점을 구축하고 농성한다.
임진왜란최대의 격전지 울산성
서생성과 울산성(蔚山城)은 조선침략의 교두보로 이용 하기 위해 가토 기요마사가 직접 설계하고, 일본에서 데려온 공병부대(축성인부) 1만6천명을 동원시켜 가토 기요마사의 부장들이 공사를 시작하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유재란 시작부터 장기농성을 계획하고 보급과 철수가 용이한 조선의 해안지대에 축성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정유재란의 목적이 전쟁에 동원된 다이묘들에게 분배할 영지를 확보 하기 위한 목적의 전쟁 이였기 때문 이였다. 울산성 건설에 동원된 공사장의 병사들은 전투와 함께 축성에 내몰렸다. 울산성 전투는 경주성에서 이동한 조선군 1만1천5백명, 명군3만6천명의 대군이 병영과 염포를 잇는 일본군 진지를 압박하고 있었다. 가장 강경파 장수인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는 조급하였다. 성을 쌓는 인부들과 병사들은 밤낮이 없었고, 태만한 자는 죄수처럼 감방에 처넣고 고문까지 하였다. 오이타(太田一吉)와 동행하던 승려 경염(慶念)의 기록 조선일일기를 보면 그들의 비참한 모습을 그대로 적어놓았다. 공사 현장의 병사와 인부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인근 산으로 목재 채취에 내몰렸고, 밤을 새워가며 석재를 끌어 올렸다. 목재(木材)를 가지러 산으로 가면 당인(唐人)에게 목이 잘려 죽음을 당하는 일이 예사였다. 노예 같은 모습을 보고 경염(慶念)은 같은 일본 사람이지만 “저 세상가면 반드시 지옥행”이라면서 치를 떤다. 이때 울산 읍성과 좌병영성의 성벽이 헐려 나갔다. 석재가 모자라고 목재가 부족하자 인근의 마을의 한옥 향교 같은 건물이 헐리기도 하고, 큰 건물은 모두 불타거나 전쟁으로 초토화 되었다. 명과조선군의 포위망이 좁혀오는 위급한 상황이라 정말 우마(牛馬)같은 엄청난 혹사 끝에 정유년(1597년)12월 울산성은 거의 완성된다. 성은 천수각(天守閣) 남쪽에 자리잡고 높이는 약5m 동서약 60칸, 남북이 30칸 규모였다. 성의 북방 조금 낮은 곳에 제2성채를, 그리고 제3성채를 성의 서북쪽에 겹으로 쌓아, 길이는 총연장 2.5Km이며 성 남쪽에는 태화강이 흐르고있어 언제든지 배가 정박 할 수 있도록 시설을 하였다. 성이 완성되고 일본군의 주요진지가 울산성 중심으로 이동하자 전투가 시작된다. 울산성의 전투는 정유재란 최대의 격전지답게 6만명의 대연합군이 편성되고, 조선군 도원수(총사령관)권율(權慄)장군, 의병장 곽재우(郭再佑),경상좌병사 고언백, 우병사 정기룡, 별장 김응서, 경주 부윤, 충청병사, 진주목사, 울산군수 김태허(金太虛)등이 지휘한다. 조명의 주력부대는 삼포 왜인(倭人)들의 거주지 염포를 점령하고, 태화강으로 진격하면서, 울산성을 포위한다. 지원군 차단을 위해 양산성 전투를 함께 시작하여 12월23일 조명(朝明)연합군의 대 공격으로 이틀 동안의 전투에서 1천1백2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만다. 그뿐 아니라 태화강마저 봉쇄 당해, 수원과 식량 보급 등 병참선이 끊어진다 .태화강의 봉쇄는 왜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으로 군선은 불타고 서생포의 왜군들과도 연락이 두절되어 완전히 고립된다. 밤이면 시체가 즐비한 연못가에서 피 섞인 물로 갈증을 풀었고, 군량은 바닥나 종이를 씹고, 벽토(壁土)긁어다 끓여 먹다고 기록되어있다. 우마(牛馬)를 잡아먹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종래에는 성벽 밖으로 나와서 적병의 시체를 뒤져 찐쌀과 저린 쇠고기를 찾아 먹기도 하였다. 오오타(太田一吉)의 시종으로 종군한 오오코우치(大河內秀元)가 만년에 정리한 “조선(朝鮮)이야기”는 식량부족으로 날마다 야위어 가는 자신의 몸매에 대해 적고 있다. 각반을 찰수없을 정도로 장단지에 살은 하나도 없고 뼈에 가죽만 붙어 있다고 적고 있다.13일간의 전투에서 쌍방 1만2천여명이 부상 또는 전사하였다. 특히 조선군으로 편입된 울산의병들의 활약과 희생이 컸다. 염포 전투와 울산성의 태화강에 정박해있던 일본 군선을 불태운 전투는 이 지역 지형에 익숙한 의병들의 몫이었다. 조명연합군에 포위된 울산성은 구마모토(熊本) 성처럼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닌 의외로 허약한 성 이였다. 이것은 태화강을 끼고 있었으나 평지 한가운데 고립되는 지형적 특색과 식량, 식수 고갈 등이 태화강하류의 차단 때문에 처절한 패배를 맛보았다. 후시미성의 히데요시에게 보낸 울산성 밀사의 최후의 편지에는 “지원이 되지 않으면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결심한 바가 있습니다”라고 적혀있다. 굶주리고 지친 병졸들은 아사하거나 동사했다. 울산성의 참상을 알게된 왜군은 이듬해인 1598년1월5일 경상도지역에서 차출된 1만3천명은 서생포에서 육로로 남창 덕하를 지나 삼신에서 태화강을 도강하고 염포에서 태화강하류로 4만5천명의 대규모 구원병을 울산성으로 출동시켜 조. 명 연합군과 대접전이 벌어진다. 온종일 검은 연기와 조총소리로 울산읍성 병영성 염포일대는 천지를 진동한다. 겨울해가 일찍 떨어지자 조. 명연합군은 경주성 모화로 철수한다. 명과 조선의 포위망을 뚫은 가토 기요마사는 구사일생으로 서생성으로 퇴각한다. 울산성안의 1만여명(유키나가,오타 가즈요시 병력3천명.가토 기요마사 5백명.축성인부등)중에 절반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병영과 울산성 사이는 시체가 산을 이루었고, 모진 겨울 북풍은 울산성의 불길를 더욱 거세게 만들었고, 완공된 지 한 달도 채 안되어 한줌의 재로 날아가 버렸다. 울산향교와 울산읍성의 모든 건물들, 피난가버린 인적없는 민가들이 침략군들의 화풀이 대상이었고, 울산읍 성내의 모든 건물은 불타고있었다. 함월산에서 침략군들의 횡포를 내려다보는 울산의병들은 조선의 운명을 한탄하며 긴 한숨만 내 쉴 수밖에 없었다. 울산성의 패배로 전의를 상실한 일본 침략군의 적장들은 안골포에서 작전회의를 한 후, 울산 양산 순천의 3개 왜성을 포기하자는 의견을 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엄명으로 수포로 돌아갔고, 전쟁 마지막에는 이핑게 저핑게로 철수하는 무장들이 많아서, 14만5천명의 군대가 절반이나 줄어든 상황에서 울산성 양산성 여천성을 사수하라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엄명은 아무위력이 없었다.
울산성은 역사의 현장
서생성과 함께 울산성은 조선반도의 요충지로, 울산성 사수를 여러번 언급 하였지만, 1598년 5월 초순부터 전쟁은 완전히 소강상태가 되었다. 이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권력투쟁의 장고를 거듭하느라고 조선전쟁은 안중에도 없었다. 히데요시는 발병 1백일된 1598년 8월 18일 한밤중 병사했다. 국내정치(아들 히데요리의 후계자 옹립)에만 급급했지 조선에 출병하여 남아있는 7만여명의 일본군들에게는 유언한마디 없었다. 이것을 명분으로 7년 동안 전쟁에 지친 병사들은 앞다투어 전면철수 하였다.
한가지 주목 할만한 것은 정유재란때 패배 하게된 싸움이 울산성 전투라고 그들도 인정하는 점이다. 그 처절한 기록을 지금도 볼 수 있다. 규슈(九州)의 북쪽 가라츠(唐津) 부근 나고야(名護屋)성의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에 울산성 전투도가 있다. 성을 에워 산 조.명 연합군에 겹겹이 쌓인 채 고전하는 일본군의 모습을 보고 있다. 당시 울산성의 대혈전을 생생하게 묘사한 이 전투도는 구원병의 장수였든 나베시마 나오시게에 의해 그려진 울산전투의 포위망 그대로였다. 열겹으로 에워산 조.명연합군, 전투도 한쪽을 보면 성벽 안쪽에서 말을 잡고있는 군사도 보인다.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성 전투에서 패배한 후 구마모토로 돌아가 울산성과 같은 시기에 구마모토성을 축성한다. 울산성 전투를 경험으로 난공불락의 요새로 지었고, 마르지 않는 깊은 우물은 지금도 그대로 있다. 천수각 다다미 속에는 비상식량으로 짚 대신 마른 고구마줄기를 넣기도 했다. 울산성이 함락되면 할복자살을 기도했던 가토 기요마사, 그들은 퇴각하면서 선량한 조선 민중들를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코를 베고 귀를 짤라 소금에 절이고 식초에 담아 일본으로 가져갔다. 귀 무덤도 이때 생긴 것이다. 그리고 강제로 끌려간 울산사람들은 구마모토성 남쪽에 울산마을(蔚山町)에 살게하였고, 지금은 도심지가된 그곳에 마을 이름은 없어졌지만 버스, 전차정류장 이름만 쓸쓸히 울산사람을 반기고 있다. 울산성 전투는 정유재란(丁酉再亂) 최대의 격전지이고 임진왜란 7년전쟁 최후의 승부처로 조선침략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처절한 패배를 안겨준 역사의 현장이다. 우리가 이곳을 새롭게 조명하여 민족교육의 터전으로 삼자. ufyws@hanmail.net 향토사 연구가.울산연합신문 논설위원역임 일본학 전공. 동국대 사회과학대학원(석사과정) 34세 원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