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버린역사 대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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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원석(尹元錫) 조회 2,487 작성일 09-12-22 16:42본문
잃어버린 역사 대화루(大和樓)
울산시의 핵심 사업 중에 하나인 태화루(太和樓) 복원사업의 그림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로얄 예식장과 인근 집들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우뚝 설 태화루의 모습은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와 비슷한 울산의 상징물이 될 전통 건축물로 선보일 것이다. 신라시대 전설처럼 사라진 한 사찰의 종루나 문루각으로 지어져 선현들의 옛 문집과 지리지에 등장하는 이 누각의 복원은 잃어버린 울산고을의 옛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는 크나큰 사업이다. 필자는 태화루의 옛 이름이 대화루(大和樓)라는 의견을 울주문화지(2006)에 처음 발표하었고, 지역 언론을 통해 공개하였다. “대화루에 얽인 역사의 진실은” “태화루가 아닌 대화루라야 한다”, “학성지는 울산 최초의 읍지인가?”가를 통해서 향토사 연구가들에게 큰 과제를 던지고, 언론을 통해 지상논쟁을 하기도하였다. 그런데 최근에 관계자들이 이 문제에 대한 연구와 대화루 명칭에 대한 역사적 조사를 시작하였다고 하니 뒤늦은 감이 있지만 울산시의 방침은 매우 적절한 조치이다. 태화루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침탈하면 붙여진 이름이기에 다시 한 번 살펴보고 건너가자는 것이다. 대화루는 천년이 넘은 세월을 거쳤지만, 태화루는 일제가 지어준 뼈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속에 등장하는 대화루
대화루의 근본은 대화강(大和江)이다. 이 강의 명칭은 삼국유사의 제5권 낭지승운보현수(朗智乘雲普賢樹)에 처음 등장한다. 산의 동쪽에 대화강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중국대화지의 용의 복을 빌기 위하여 만든 것이므로 용연이라 한 것이다.(山之東有大和江乃爲中國大和池龍植福所創故云龍淵) 큰 大 자나 클 太 자의 한자의 뜻이 같아서 기묘한 주장을 하는 사학자도 있으나 삼국유사를 국역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대화강“으로 기술하였다. 언양의 남천, 취성천, 범서굴화천, 대화강, 네개의 강 이름이 태화강으로 개명되는 시점이 일제강점기이다. 이때 원포리(遠浦里)등이 태화리로 변했다. 대화사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구전설화는 신라 선덕여왕(632-647)때로 전해오고 있다. 사찰의 소멸로 용연 절벽에 홀로 남은 대화루의 허물어짐을, 옛 선현들이나 고을의 백성들 모두가 안타깝게 생각하였으나 임진왜란 이전에 폐허로 변한듯하다. 임란전사에 따르면 울산읍성 서문 밖의 이곳에서 일본군과 전투가 있었고, 진지가 불 탓 다는 기록 때문에 대화루의 소멸 시기를 이때로 보는 사학자도 있었다. 하여간 대화루는 터만 남고 사라졌지만 관찬(官撰)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대화루의 칭송은 대단하다. 서거정의 중신기에는 남도(南道)에 이름난 누(樓)로는 촉석, 영남, 영호, 쌍벽을 보았고, 해운대, 월영대, 관어대를 보았지만 울산의 대화루는 광원(曠遠)한 것이 나았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울산군의 누정편에는 “대화루는 고을 서남쪽 5리에 있다”라고 위치가 분명하고, 고려 성종이 동경으로부터 흥려부를 지나다가 대화루에서 잔치를 열고 수창했다는 첫 기록이 나온다. 권근의 기문, 김극기의 시서가 나오는데, 여기에는 성 서남쪽에 대화강의 길이는 6,7리나 된다고 하였다. 서거정의 중신기에는 대화루의 허물어짐을 보고 질타하는 장면도 있다. “누의 경치가 절경인데 고을의 원이 되었든 사람으로 영웅 호걸이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무 한 사람도 새로 지을 생각을 하지 않고 지금까지 내려왔단 말인가” 하였고, 설곡, 가정, 양촌선생의 글이 제판(題板)에 없어져 한탄하는 장면도 있다. 이것은 외조(外祖) 양촌의 애착도 있지만, 누각의 관리 소홀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역원편에는 대화원은 대화루 곁에 있다고 되어있고, 제영편에 은월봉은 대화진(大和津) 서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 대화진은 지금의 울산교 부근의 나룻터를 말한다. 목판 인쇄된 “대동여지도”(1861)에도 대화강이 나타나있다.
태화루 복원은 역사의 복원도 함께해야한다.
진주 촉석루(경남도 문화재자료8호)명칭의 유래는 호정 하륜의 촉석루기에서 나왔고, 밀양 영남루(보물147호)는 영남사(嶺南寺)의 작은 사찰이 근원이다. 하지만 태화루는 도호부객관에 일제가 붙인 이름이다. 대화루의 고유한 명칭을 묻어버린 일제의 개명을 아직 많은 시민들은 모르지만, 역사의 진실은 밝혀 주는 것이 순리이다. 그래서 울산의 랜드마크가 되는 태화루 복원 책임자들은 올바른 역사적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복원하는 역사공원에는 단 한 번도 태화루 라는 현판이 걸려본 적이 없는 대화사 절터 입구에 대화루의 현판을 걸어야 하는 것이 역사성을 더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또한 이휴정에 보관된 태화루 현판은 1940년 울산공립보통학교(울산초등) 앞의 도로확장으로 헐려진 누각에 있던 것을 울산지명사에는 서거정의 글씨라는 등 옛 대화루의 현판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누각의 복원도 중요하지만 역사의 복원도 함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34세 원석(지역사 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