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坡平尹氏 昭靖公派蔚山 蘇亭門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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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최초의 읍지 학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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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원석(尹元錫) 조회 2,584 작성일 09-12-22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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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성지(鶴城誌)는 울산최초의 읍지(邑誌)인가?




최근 대화루(大和樓)에 대한 지상논쟁을 통해서 참으로 해괴한 글을 접했다. 역사학자라고 자칭하는 송 모씨는 해박한 필체를 통해서 참으로 해괴한 논리를 전개하고 실명을 거론하며 허위 사실를 공포하여 독자들을 우롱하였다. 대화루가 조선조 후기에 태화루(太和樓)로 개명되었다는 필자의 주장을 “각종 문헌의 大 자를 太자로 일본인이 조작, 변조했기 했다고” 와전시켜 필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등 전혀 다른 억지 주장과 비방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학성지의 누정 편에 기록을 들먹였다” 그래도 역사의 진실은 둘이 아닌 하나이기에 대화루의 비밀을 푸는 첫 단초로 울산의 자존심이 걸려있는 울산최초의 읍지 학성지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학성지는 공식 발간되지 않았다.




읍지는 관찬읍지(官撰邑誌)와 사찬읍지(私撰邑誌)가 있다. 관찬읍지는 개인이 소장 할 수 없었고, 사찬읍지는 문중이나 개인 소장이 가능하였다. 사찬읍지는 똑 같은 읍지라 하여도 필사본의 영향으로 많은 부수를 발간 할 수 없었기에 글씨체나 내용이 틀리는 경우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읍지가 훼손되면 다시 필사 하는데 그 때는 내용이 달라지기도 한다. 읍지라는 것이 고을의 연감에 해당되어 호구 수, 남녀 인구수의 변동이나 과거급제, 포상, 연혁, 성씨, 풍속, 산천, 토산, 학교, 역원, 인물, 사원, 누정, 봉수등 지역사정의 종합편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크게 잘못이해 하고 있는 것은 필사본의 여러 읍지들을 최초에 발간된 원본읍지라고 착각 하고 있는 것이다. 사찬읍지는 언제 만들어졌는지가 중요하다. 울산 최초의 읍지라는 학성지는 영조11년(1735)에 권상일(1679-1759 청대(淸臺) 구강서원 설립)이 부사로 부임하면서 편찬 작업이 시작 되었다. 읍중의 어른(父老)들 요청으로 진사 박망구와 사인(士人) 이원담(李元聃)등으로 편찬위원이 구성되어 초본을 만들었다. 그런데 14년이란 세월을 지나 영조25년(1749)에 초본을 다시 증보하여 한양으로 돌아간 권상일 부사에게 원고를 보냈는데 이때 권상일부사의 나이 70세 이였다. 울산부사로 부임 할 때는 춘추관편수관을 겸임하였으나 대사헌 등을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조선시대 정2품 이상 퇴임 관리기구)에 들어간다. 이때 학성지는 간행되었고, 1894년에도 재간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나 판본이 없어 이 모든 기록을 인정받지 못 하고 있다. 공식적인 출판기념회도 하지 못하고 흐지부지 된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사찬읍지 총람(한국인문과학원 1989)의 울산 편에는 1934년에 간행된 울산읍지를 실어놓았다. 그리고 울산광역시사(2002) 지리지편에 학성지는 공식적으로 발간된 적이 없다고 울산시의 기본입장을 분명히 기록하였다. 이래도 불법유인물에 해당되는 학성지운운하는 일부 역사학자들과 향토사연구가들의 악의에 찬 이중성이 놀랍기만 하다. 조작된 학성지의 옛 지도도 등장하였다. 김정호가 만든 지도 이전의 조선조의 대부분 지도(채색지도)는 제작자와 연대가 불문명한 것이 한국고지도의 특색이다. 이것은 국보(248호)로 지정된 유일한 조선방역도(朝鮮方域圖1557년)도 최근에 제작연대가 밝혀진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일제가 조선침탈을 시작한 연대인 고종31년(1894년)이후에 남천, 취성천, 굴화천, 대화강등이 태화강으로 개명되고 태화루 현판이 자연스레 학성관의 문루에 등장한 것이다. 太 자나 大 자가 한자의 의미가 같다고 혼용되었다는 옹색한 주장은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이나 초등학생들에게 혼란을 초래한다. 대동강을 태동강이라 부르고 태평양을 대평양이라 불러도 된다는 주장이다. 한자의 뜻이 같아 서로 통용되는 글자이지만 고유명사에 혼용하는 경우는 없다.




학성지는 전설속의 읍지




조선조 후기의 사찬읍지는 대부분 필사본으로 전해 오기 때문에 신뢰도가 떨어진다. 울산의 최초읍지라는 학성지의 경우 판본이 없는 상태라 더욱 그렇다. 그래서 학성지의 실체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말아야한다. 전설속의 읍지학성지를 역사와 혼돈해서 안된다. 1962년 태화동 반탕골에서 12지상 부도가 발견되어 전설속의 태화사를 새롭게 조명하듯이 학성지의 존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확실한 판본의 발굴이 시급하고 그 후 울산시사를 다시 고쳐야한다. 2007.4. 경상일보 기고문 34세 원석